정각의 얼굴, 23시 59분의 뒷모습

by beyond juri
바닷가.png 결코 정각의 얼굴로 나타날 수 없는 은근한 진심(이미지 출처: Unsplash)

편집된 정면(正面), 얼굴


우리는 평생 서로의 편집된 정면(正面)만을 소비하며 산다. 매일 정성껏 디자인된 표정 뒤에 숨어, 필요한 부분만 매끄럽게 전시한다. 나의 얼굴은 사회적 의례의 전시장이다. 그래서 얼굴은 가면이다. 누굴 만나는 이상, 화장을 하든 안 하든.

그런데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가면은 하나가 아니다. 맡은 역할에 따라 수많은 페르소나를 겹쳐 쓰며 끊임없이 가면을 재편한다. 썸네일이 하나가 아니듯, 얼굴은 얼마든지 근사하게, 카리스마 넘치게 다양하게 꾸밀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은 진실을 대면하기보다 '보여질 나'를 가공하는 무한한 편집의 연대기가 된다.

진짜 얼굴이 있기나 한 걸까?

편집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정작 자신의 진짜 얼굴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매끄럽게 보정된 썸네일 뒤에서 숨이 가빠질 때쯤, 나는 문득 당신의 뒷모습을 본다.


그 사람의 생(生)을 목격하는 순간


뒷모습에는 표정이 없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근육을 긴장시키거나, 근사한 각도를 찾아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다. 그저 중력과 세월을 정직하게 받아낸 실루엣만이 그곳에 남는다. 얼굴이 사회적 전시장이라면, 뒷모습은 수식어가 거세된 유일한 영토다. 가면이 미처 덮지 못한 그 투박하고 무방비한 공간을 마주할 때, 나는 비로소 편집되지 않은 당신의 진실과 조우한다.

보통 우리는 입이 가장 말을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심은 입보다 몸, 그것도 뒷모습에서 많이 포착된다. 우리는 얼굴에서 의도를 읽지만, 뒷모습에서 운명을 읽는다. 우리는 얼굴을 보며 대화하지만, 정작 그 사람의 생(生)을 목격하는 순간은 그가 등을 돌려 멀어질 때다. 걸음의 속도, 어깨의 기울기, 고개의 각도, 잠시 멈칫하는 동작 속에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아직 말해지지 않은 사연이 스민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 결코 감출 수 없는 은밀한 진심(이미지 출처: 영화 <화양연화> 스틸컷)



<화양연화>, 뒷모습의 조용한 고백


<화양연화>에서 왕가위의 카메라가 인물의 얼굴보다 뒷모습을 더 오래 비추는 이유도 아마 같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장면은 수리진의 화려하고 타이트한 치파오나 ㅇ 차우의 정갈한 포마드 헤어가 아니다. 좁고 어두운 국수집 계단, 부딪칠 듯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비껴가던 그들의 침묵의 뒷모습이다. 배우자의 불륜이라는 비극 앞에서도 그들은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며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서로를 대한다. 그들의 앞모습은 타인이라는 페르소나로 단단하게 포장된 사회적 장치다.

하지만 국숫집의 좁은 계단을 부딪칠 듯 아슬아슬 서로 비껴가는 두 남녀의 뒷모습,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는 수리진의 가녀린 등줄기에서 우리는 그녀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수천 마디의 슬픔을 읽는다. 그것은 연출된 연기가 아니라, 중력에 저항하지 못한 육체의 솔직한 고백이다.

뒷모습의 진심. 사극에서 지존(至尊) 앞에서 등을 보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닐까. 들키고 싶지 않은 권력에 대한 진심을 지존(至尊)이 읽어 버릴 것에 대한 염려가 뒷걸음질 치게 했던 것은 아닌지? 절대 권력자 앞에서 끝내 등을 돌리지 못하는 이 절박한 퇴장은,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진심을 보이지 않으려는 예법이라는 이름의 처세일 것이다.


정각이 되지 못하는 23시 59분의 진심


결코 정각의 얼굴로 나타날 수 없는 은근한 진심, 뒷모습. 정교하게 보정된 정각의 세계가 가동되기 직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자투리 시간의 진실. 이 1분의 영토에서 인간은 가면을 벗는다. 얼굴이 세밀한 설계도라면, 뒷모습은 미처 단속하지 못한 운명이 고요히 고이는 곳이다.

결국 삶이란 서글프게도 정각의 가면을 쓰기 위해 23시 59분의 진심을 유기해 온 연대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