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가 나를 스치고 지나갈 때

[고양이가 허락한 인테리어]# 5에필로그

by beyond juri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4주 내내 르노와르를 오독하고 있었다.


골판지 박스를 선택하는 르노와르를 보며 '본질을 아는 존재'라고 썼고,

플라톤을 밀어낼 때는 '직관적 편집자'라고 불렀으며, 오전 11시의 햇살을 따라 이동할 때는 '카이로스의 화신'이라 생각했다. 벽지에 남긴 흔적조차 '사인(Sign)'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전부 내가 붙인 이름이다. 르노와르는 그 어떤 이름도 요청하지 않았다.


우리는 타자의 무심함을 번역하는 데 중독되어 있다. 반응하지 않으면 '쿨한 것'이고, 골골거리면 '사랑의 표현'이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관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번역들은 전부 인간의 언어로 쓰인 오역이다. 고양이는 번역을 요청한 적 없다. 단지 해독 불가능한 원문으로 남아 있을 뿐인데, 우리는 자꾸만 조악한 주석을 단 번역본을 들이민다.



그러다 어느 날 르노와르의 꼬리가 나를 스치고 지나갈 때,


사실은 특별한 장면이 아니었다. 그는 소파에서 창가로 이동하는 중이었고, 나는 그 경로 위에 있었다. 꼬리가 내 종아리를 스쳤다.


나의 번역이 또 시작됐다. '관심의 표현'인가, '영역 확인'인가. 그런데 그 순간, 멈췄다.

르노와르가 지나가는 길목에 내가 있었을 뿐이다.


그것뿐이었다. 의미도, 신호도, 애정의 코드도 아니었다. 그냥 이동 중인 고양이와 경로 위의 인간이 잠깐 닿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의미를 부여받아서가 아니라, 그냥 거기 있었기 때문에 스친 온기. 그것이 언어 이전의 가장 오래된 형태의 접촉이다.


르노와르는 여전히 내 침대의 정중앙을 점유하고, 노트북 자판를 지나가며 암호와도 같은 'ㅁㄴㅇㄹ'을 남기며, 세라믹컵을 식탁 끝으로 민다.


나는 여전히 그 옆에서 비좁은 모서리에 몸을 구겨 넣고, 깨진 컵을 쓴다. 우리 사이에 번역된 것은 없다. 르노와르는 내 의미 체계에 끝내 참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참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Gemini_Generated_Image_dux2r5dux2r5dux2.png 영토를 점령한 정복자의 차갑고 도도한 지배력(구글 제미나이 3 Flash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


번역되지 않는 존재와 한 집에 산다는 것. 아무리 정교한 주석을 달아도 원문은 원문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원문이 오늘도 오전 11시의 햇살 속에서 눈을 감고 있다는 것.


르노와르는 이 글을 읽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은, 처음부터 나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이 번역되지 않는 존재들과 함께 살아간다.


고양이만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자와의 번역 불가능성 속에 던져진다. 우리는 언어를 발명하고, 표정을 읽고, 관계에 이름을 붙이며 그 간극을 메우려 했지만—결국 옆자리의 사람도, 오래된 친구도, 때로는 거울 속의 나 자신도 완전히 해독된 적 없이 그냥 거기 있다.


문명의 긴 시간 동안 우리가 쌓아온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해독되지 않은 채로도 함께 있는 능력이었는지도 모른다. 번역 없이도 같은 식탁에 앉고, 같은 햇살 아래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것—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예의다.


꼬리는 오늘도 종아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나는 또 잠깐 멈췄다가, 다시 걷는다.




다음주부터는 새로운 브런치북 [나쁜 커피]가 매주 수요일 발행됩니다.

* 단 1화는 25일(수) 발행됩니다


제1부: 감각의 고백

제1화. 안락한 마비, 화학적 침묵(3월 25일 연재 완료)

제2화. 손이 먼저 알고 있다(4월 1일 연재 예정)

제3화. 우리에겐 필요한 건 권태야

제4화.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피하고 있나


제2부: 역사의 고백

제5화. 스페셜 등급 뒤에 가려진 것들

제6화. 공정무역이라는 이름이 곧 상품

제7화. 싱글 오리진이라는 낭만

제8화. 직거래라는 수사(修辭)


제3부: 신체의 고백

제9화. 미래의 생기를 당겨 쓰는 몸의 경제학.

제10화. 박동이 빨라지는 건 활력이 아니라 동기화다.

제11화. 디카페인이라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자기기만.


제4부: 사물의 고백

제12화. 서스펜디드 커피, 이름을 묻지 않는 따뜻함

제13화. 외면당한 것들의 조용한 귀환.

제14화. 지워지지 않는 테두리가 남긴 하루의 기록.

#12화: 환대 없는 식탁을 완성하는 셀프 노동의 시간


[사유의 공간 미리 구독하기] https://brunch.co.kr/brunchbook/beyond-yuri





작가의 이전글[고양이가 허락한 인테리어] #4_낙서와 Si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