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는 패션이지!] #4화: 아이언맨의 언더웨어

브랜드라는 갑옷, 언더웨어라는 실존

by beyond juri
차가운 강철 수트가 인공적인 빛을 반사합니다. 육체는 보이지 않습니다.(이미지 출처: 마블 홍보사이트)




아이언맨의 수트 — 영웅도 브랜딩 시대


히어로들에게는 불문율이 있다.

정체를 숨겨라. 슈퍼맨은 안경을 쓰고 구부정한 클라크 켄트가 되고, 원더우먼은 평범한 여비서 다이애나 프린스로 살아간다. 스파이더맨은 마스크를 벗는 순간 세계가 무너진다.

정체 노출은 곧 죽음이다. 히어로의 이중생활은 숙명이자 윤리다.

그런데 토니 스타크는 기자회견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선언한다.


"I am Iron Man."

이 한 문장이 히어로 서사의 문법을 통째로 뒤집는다.


숨지 않는 히어로

마블이 창조한 히어로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웅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

슈퍼맨은 크립톤에서 떠밀려왔고, 헐크는 사고로 만들어졌으며, 스파이더맨은 거미에 물렸다.

영웅성은 그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아이언맨은 다르다.

토니 스타크는 스스로 영웅이 되기로 결심하고, 직접 하이테크 수트를 제작해 슈퍼히어로로 태어난다.

영웅성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설계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숨지 않는다.


다른 히어로들에게 정체 노출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토니에게 정체는 처음부터 자신이 선택한 브랜드였다. 숨길 이유가 없었다.

스타크 인더스트리, 아이언맨 수트, 토니 스타크라는 페르소나는 하나의 완벽한 패키지로 세계에 각인된다.


여기서 아이언맨의 첨단 수트가 다시 보인다. 슈퍼맨의 빨간 팬티가 문화적 이질성의 산물이었다면, 아이언맨의 수트는 처음부터 의도된 전시다.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재설계하는 것. 수트의 유선형 실루엣은 토니 스타크의 몸이 아니라 브랜드 아이언맨의 몸을 만들어낸다. 근육의 위치, 어깨의 너비, 가슴의 각도까지


— 이것은 갑옷이기 이전에 미디어다.



영웅성이 퍼포먼스가 된 시대

슈퍼맨의 영웅성은 험블에서, 원더우먼의 영웅성은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에서, 헐크의 영웅성은 억누른 자아에서 왔다. 모두 내부에서 길어 올린 것들이다.


그런데 아이언맨의 영웅성은 밖에서 온다. 보여주는 방식에서 온다.

진짜 능력보다 퍼포먼스가 중요해진 시대. 아이언맨은 그 시대의 첫 번째 히어로다.

영웅성을 상품화하고, PR하고, 브랜드로 만든 최초의 존재. 수트는 그 브랜드의 가장 강력한 광고판이다.


이것이 낯선 이야기인가.

우리는 지금 매일 자신을 브랜딩한다. 링크드인의 프로필, 인스타그램의 피드, 정성껏 고른 프로필 사진 한 장


— 우리는 끊임없이 "I am ___"을 선언한다.

토니 스타크가 히어로 중 가장 현대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몸의 내부가 아닌, 밖으로 보여지는 것이 존재하는 것임을 이해한 영웅이었다.


하이테크 수트를 입기 전의 언더웨어의 아이언맨(이미지 출처: 2008 영화 <아이언맨> 스틸컷)


그러나 수트를 벗으면


단 하나의 균열이 있다. 그 강력한 수트를 입기 위해 토니 스타크는 결국 몸에 딱 달라붙는 얇은 언더웨어를 먼저 입어야 한다.


가장 화려한 갑옷의 시작은 민망한 언더웨어다. 브랜드의 외피가 두꺼워질수록 그 안의 몸은 더 얇아지고 더 노출된다. 퍼포먼스가 완벽할수록 그 안의 인간은 더 깊이 숨는다.


가장 무장한 자가 가장 벌거벗는다.

"I am Iron Man"이라고 선언했지만, 그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건 어쩌면 이것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아이언맨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연재 마무리 및 브런치북 연재 예고]


영웅의 외피를 훑던 기록은 여기서 마칩니다. 이제 시선은 더 내밀한 곳으로 향합니다.

3월 8일 일요일, 새로운 연재 <명명되지 않은 것들>을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보지 않기로 길들여진 일상의 피막을 해부합니다.


[명명되지 않은 것들]

#1화: 하루의 계급이 진열되는 공간(3월 8일)

#2화: 지극히 느슨하고 위태로운 연결

#3화: 버려지는 것들의 자서전

#4화: 붉은 수사학으로 빚어낸 감각의 해방

#5화: 타인의 시선으로 편집된 나의 오늘

#6화: 가장 단단하고 고요한 경계

#7화: 이름 석 자 아래 묻어두기로 한 것들

#8화: 입술을 지우고 눈빛으로만 말하는 법

#9화: 누군가가 나의 결핍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10화: 나를 가장 오래 훔쳐본 타인

#11화: 0과 1 사이를 위태롭게 잇는 생존줄

#12화: 환대 없는 식탁을 완성하는 셀프 노동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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