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허락한인테리어]#2 책장의질서와 꼬리의 무질서

플라톤보다 무거운 고양이

by beyond juri
질서 정연한 책들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가장 비합리적이고 역동적인 마침표, 고양이의 꼬리(이미지 출처: 구글 제미나이 3)



엄숙한 질서의 영토, 서재


집안에서 가장 집사의 자아가 강하게 투영된 곳을 꼽으라면 단연 서재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은 집사의 지적 편력을 증명하는 질서 정연한 군대와 같다. 가나다순으로 정렬된 문학 전집, 출판사별로 각을 맞춘 인문학 서적들, 그리고 언제든 인용할 준비가 된 전공서적까지.


이곳은 인간의 이성이 설계한 가장 정교한 '질서의 영토'다. 물로 르노와르가 보기엔 그냥 '계단이 많은 방'일 뿐이지만.


이 책들 중 상당수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 채 그저 소유됨으로써 존재한다.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안티라이브러리(Antilibrary)', 즉 읽지 않은 책들이야말로 나의 무지를 일깨우고 끊임없이 겸손을 가르치는 진짜 도서관이다.

르노와르에게 이 안티라이브러리는 집사가 돈 주고 산 발판이다. 읽지 않은 책일수록 먼지가 덜 쌓여 있어서 발바닥 감촉도 좋다. 집사는 가끔 책장 앞에 서서 책등을 쓰다듬으며 다짐한다.


'이번 주말엔 저 책을 펼쳐봐야지.'


르노와르는 그 모습을 3단 높이에서 내려다보며 비웃는다. '흠... 안 읽을 거면서.'


고양이가 재정의하는 서재


르노와르가 서재에 처음 입성한 날, 집사는 경고했다.

"책장은 올라가는 곳이 아니야."


르노와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직으로 서 있고, 발판이 여러 개 있고, 꼭대기에 햇빛이 들어오는 곳. 이게 올라가는 곳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인간의 언어는 참 이상하다.

첫 등반은 과감했다. 집사가


"안 돼!"를 외칠 때,


이미 르노와르는 2단을 지나 3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발밑에서 플라톤의 <국가> 살짝 삐걱거렸다. 플라톤쯤은 르노와르의 5kg을 견딜 수 있어야 했다. 집사는 아래에서 팔을 휘저으며


"내려와! 제발!"을 반복했다.


르노와르는 4단에 도착해서 집사를 내려다봤다. 집사의 손은 르노와르에게 닿지 않았다. 완벽한 승리였다.


그날 이후, 비평서 3단과 소설 서가 4단 사이는 르노와르의 전용 고속도로가 되었다. 집사가 '문학의 흐름'이니 '장르별 분류'니 하며 며칠 밤을 새워 만든 체계는,

르노와르에게 그저 '왼쪽 길'과 '오른쪽 길'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솔직히 왼쪽이 좀 더 넓다.


르노와르는 자주 왼쪽을 쓴다. 집사의 '프랑스 현대문학' 섹션이 조금씩 앞으로 밀려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양이 사서의 도서 선정 기준


어느 날, 르노와르는 책장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오늘은 어떤 책을 떨어뜨릴까. 이건 단순한 장난이 아니다.

르노와르만의 엄격한 기준이 있다.

첫째, 너무 오래 같은 자리에 있었는가.

둘째, 집사가 "언젠가 꼭 읽을 거야"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셋째, 떨어뜨렸을 때 소리가 좋은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책이 바로 오늘의 선택이다.



<동굴의 우화>가 카펫 위에 보기 싫게 널브러져 떨어졌다. 양장본이라 소리도 둔탁했다. 집사는 한숨을 쉬며 책을 집어들었다.


"또 너야? 이 책 얼마 주고 샀는데..."


르노와르는 책장 4단에서 앞발을 핥으며 무심한 척했다. 하지만 귀는 집사 쪽으로 향해 있었다. 집사가 중얼거렸다.


"5년 전에 샀는데 한 번도 안 읽었네..." 바로 그거다. 르노와르의 선구안이 또 적중한 것이다.


집사는 무심코 책을 펼쳤다. 떨어진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막막함은 시작의 신호다.
백지 앞에서 느끼는 공포는
곧 창조의 전조다.


집사는 잠시 멈칫했다. 마침 오늘 아침부터 보고서를 써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건... 우연일까?


르노와르는 책장에서 내려와 떨어진 책 위에 정확히 앉았다. 꼬리로 페이지를 덮으며 집사를 올려다봤다. 표정이 묻고 있었다.


"읽어?" 집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진짜 이걸 고른 거야?"


르노와르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당연하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5년 동안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 고양이의 앞발 한 번에 집사에게 배달되었다. 아마존 프라임보다 빠른 배송이었다.


지식의 요새를 무너뜨린 작고 날카로운 침공, 책장 모서리에 새겨진 고양이만의 서명(이미지 출처: 구글 제미나이 3)


영역 표시의 기술


르노와르가 책장에서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일은 '마킹'이다. 인간들은 이것을 '영역 표시'라고 부르지만, 르노와르는 '소유권 명시'라고 부른다.


방법은 간단하다. 책등에 턱을 문지른다. 특히 양장본이 좋다. 표면이 매끈해서 체취가 잘 묻는다.


집사가 가장 아끼는 초판본 몇 권에는 이미 르노와르의 냄새가 배어 있다. 집사는 모른다.

그 책을 꺼낼 때마다 르노와르가


"내 거"라고 적어둔 보이지 않는 메모를 함께 꺼내고 있다는 것을.


카프카의 <변신> 책등에는 르노와르의 턱 자국이, 사르트르의 <구토>에는 송곳니 자국이 살짝 남아 있다. 실존주의가 고양이를 만났다. 고양이가 이겼다.


안티라이브러리의 진짜 주인


이제 집사의 서재는 르노와르와 공동 소유다. 아니, 정확히는 르노와르의 소유이고 집사는 임차인이다.


책장 곳곳에는 르노와르가 지나간 흔적이 있다. 가느다란 털들, 이빨 자국, 그리고 미묘하게 비뚤어진 책들. 미니멀리스트가 꿈꾸는 쇼룸 같은 서재는 이제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대신 그곳에는 생명이 있다.

읽지 않은 책들이 주던 부채감은 사라졌다.


그 책을 베개 삼아 느긋하게 하품하는 르노와르를 보면, 뭔가 이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읽히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고양이의 낮잠 자리가 되기 위해, 발판이 되기 위해,
그리고 "아직 읽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식은 머리로 읽히기 전에, 꼬리 끝으로 먼저 감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안티라이브러리의 진짜 가치는, 읽지 않은 책이 주는 겸손함이 아니라, 그 책 위에서 낮잠 자는 고양이가 주는 평화다.


고양이의 승인 대기 중


오늘도 르노와르는 서가 가장 높은 곳에서 집사를 관찰하고 있다. 집사가 "올해 안에 꼭 읽겠어"라고 다짐한 <전쟁과 평화> 위에서 식빵을 굽는 중이다.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아마도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책을 떨어뜨리는 꿈을.


집사는 노트를 펼쳐 적는다. "서재 정리: 고양이가 잠에서 깨면 다시 생각할 것." 르노와르의 꼬리 끝이 살짝 움직인다. 집사의 계획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승인 거부를 준비하고 있다.


집사는 생각한다. 결국 이 집의 모든 인테리어는 고양이의 최종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새 연재 시리즈 [고양이가 허락한 인테리어]는 매주 수요일 밤 9시 배달합니다.


#1화_ 이태리 가구보다 골판지 한 칸- 택배 박스가 이긴 날(2월 25일, 연재 완료)

#2화_ 책장의 질서와 꼬리의 무질서- 플라톤보다 무거운 고양이(3월 4일, 연재 완료)

#3화_ 고양이는 시계를 보지 않는다- 오전 11시, 사막의 시간(3월 11일, 연재 예정)

#4화_ 낙서와 고양이의 사인(Sign)- 벽지에 남긴 명품 로고(3월 18일, 연재 예정)

#에필로그_ 꼬리가 기록한 선형적 무질서(3월 25일, 연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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