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는 패션이지!] #3화: 헐크의 보라색 바지

사라지지 않는, 혹은 포기 못한 사회적 자아

by beyond juri
뉴욕 스튜디오에서 패션 화보 촬영 중인 헐크의 가상 이미지(출처:구글 제미나이 3)



배너 박사는 화가 나면 초록의 괴물이 된다. 키 2미터 70센티미터, 몸무게 635킬로그램. 근육은 분노에 비례해 무한 팽창한다. 건물이 무너지고, 탱크가 구겨지고, 지면에 발자국이 파인다. 그런데 딱 하나, 절대 찢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지.


상의는 없다. 신발도 없다. 양말도, 벨트도, 시계도 없다. 전투 중에 착용했던 재킷, 셔츠, 심지어 속옷까지 — 전부 산화된다. 헐크가 한 번 변신하고 나면 배너 박사의 옷장은 사실상 초기화된다. 그런데 유독 바지만큼은 살아남는다. 늘어나지도, 터지지도, 색이 바래지도 않는다. 635킬로그램의 근육질 괴물을 감싸고도 멀쩡하다. 세계 최강의 방탄 소재가 따로 없다.


심지어 보라색이다.


폭발 현장에서, 잔해 더미에서, 뉴욕 한복판에서 — 헐크는 언제나 보라색 바지를 입고 등장한다. 세탁도 안 했을 텐데 구김 하나 없다. 이쯤 되면 바지가 히어로인지, 헐크가 히어로인지 헷갈린다. 마블 세계관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는 타노스도, 갤럭투스도 아니다. 브루스 배너의 보라색 면바지다.



마블이 설명하지 않기로 한 것


마블 팬덤에서 헐크의 바지는 오랫동안 ‘설명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된 미스터리였다. 초기 코믹스 시절 작가들은 그냥 슬쩍 넘겼고, 후대 작가들은 “특수 소재”라는 애매한 언급으로 봉합했다. 영화에서는 아예 건드리지 않는다. 관객도 묻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모두가 납득한다.


왜일까.


그 답은 바지의 색깔에 있다.



보라색 반바지 하나만 걸친 헐크가 도심을 질주하며 분노를 폭발 중(이미지 출처: 2003 영화 <헐크> 스틸 컷)



보라색이라는 너무 정직한 선택


생각해 보면, 헐크의 바지는 단순한 의상이 아니다. 그건 브루스 배너가 헐크가 되는 순간에도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의 상징이다. 괴물이 되어도, 이성을 잃어도, 군대가 쫓아와도 — 그는 바지를 입고 있다. 하체는 가린다. 최소한의 사회적 체면을 유지한다.

이게 패션이 아니면 무엇인가.

패션 이론에서 옷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을 한다. 신체 보호와 사회적 신호 전달. 헐크에게 전자는 해당 없다. 그 피부에 무슨 보호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헐크의 바지는 순전히 후자다. 세상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


나는 아직 사람이다.


보라색이라는 색 선택도 흥미롭다.

보라는 전통적으로 왕권, 신비, 자아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색이다. 붉음(분노, 본능)과 푸름(이성, 억제)이 뒤섞인 색. 헐크의 바지가 보라색이라는 건 너무 정직한 선택 아닌가. 그 바지 하나에 배너와 헐크가 동시에 들어있다.

초록 피부 위에 보라 바지. 보색도 아니고 유사색도 아닌, 이 어정쩡한 조합이 오히려 완벽하게 그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존재의 색.



바지의 언어, 출근의 언어


우리가 '옷을 차려입는다'고 말할 때, 그 행위의 본질은 대부분 "사회에 나간다"는 선언이다.

반대로 집에서 트레이닝복 입고 뒹굴 때, 우리는 잠깐 사회적 자아를 내려놓는다. 민낯, 헐렁한 바지, 무너진 자세

이건 퇴근의 언어다.


사회적 자아가 현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증발하는 것들.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소파에 반쯤 녹아드는 상태. 인류가 집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최종 형태는 헐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초록색이 아닐 뿐이고, 파괴력이 덜할 뿐이지

— 우리도 퇴근하면 다 괴물이 된다.

그런데 헐크는 이 퇴근을 끝까지 거부한다.



괴물이 돼도, 바지는 입어야지


분노로 자아가 폭발하는 순간에도 바지는 남는다. 이건 단순히 "찢어지지 않는 특수 소재"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배너의 무의식이 버티는 방식이다. 나는 괴물이 되어도 완전히 사회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지막 저항선.


그러고 보면 우리도 비슷하지 않나. 회사에서 치이고, 관계에서 지치고, 속으로는 다 때려치우고 싶어도

— 아침마다 바지는 입는다. 머리는 감는다. 입술을 꽉 깨물고 엘리베이터에 탄다.


헐크도 그렇다. 다만 그의 바지가 조금 더 보라색일 뿐이다.

어떤 브랜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구성만큼은 리바이스도 노스페이스도 명함을 못 내밀 것이다.


마블이 영리한 건, 이 디테일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명하는 순간 신화는 깨진다. 헐크의 바지는 논리 밖에 있어야 힘을 가진다.

우리가 "왜 저 바지만 안 찢어지지?"라고 묻지 않는 건, 어딘가에서 이미 그 답을 알기 때문이다.


찢어지면 안 되니까.

그게 마지막 남은 거니까.


패션은 때로 가장 솔직한 고백이다. 헐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보라색 바지를 입고 도시를 부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바지에서 배너를 본다.


괴물이 되어서도, 사람이고 싶었던 사람을.



[히어로는 패션이지!] 연재 예고


#1화: 슈퍼맨의 빨간 팬티, 도시로 온 이민자 - 어느 이방인의 어리숙한 생존 패션(2월 14일 토, 연재완료)

#2화: 원더우먼의 뷔스티에_ 속옷인가? 갑옷인가?(2월 21일 토 오전 8시, 연재 완료)

#3화: 헐크의 보라색 바지_ 포기 못한 자존심(2월 28일 토 오전 8시, 연제 완료)

#4화: 아이언맨의 언더웨어_ 영웅마저 외주화(3월 7일 토, 시리즈 마지막 회, 연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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