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은 먹고 시작합니다
사내 출입을 위한 보안 등록을 위해서 내 사원증을 내밀었다. 사원증에 출장 기간 동안 사내 식당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일정 금액을 넣어준다고 한다. 돈을 다 쓰면 내 사비로 충전도 된단다. 난 내 사원증으로 밀 쿠폰 결재가 된다는 것을 입사 13년 만에 처음 알았다. 풍채 좋고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흑인 아줌마가 여러 번 틱틱 대보더니????? 안된단다. 전산 오류가 있는 것 같다고 자기가 이거 처리해 줄 테니 점심 이후에 와서 찾아가라고 임시 사원증을 내어주었다. 흔한 일인 것 마냥 대수롭지 않은 무료한 말과 함께 나를 바라보는데 조금 웃겼다. 무슨 반도체를 만든다는 회사가 구멍가게처럼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안되나. 그러던 중 먼저 있던 후배가 사원증 목걸이 줄을 내밀었다. 이게 여기에서 주는 목걸이 줄이라고 기념처럼 선물한 것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목걸이 줄을 받아 드니 새로운 회사에 신입으로 입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서 내 근무지에서는 보안사업장이라 사진 촬영이나 정보 저장 등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스마트폰에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하거나 카메라에 보안 스티커를 붙여야 한다. 사내에서 태블릿을 쓰려고 Wifi 버전을 샀다가 사내 전 구역은 재밍이 되어있어서 hot spot을 띄워도 잡을 수 없게 되어 있어 반품했던 적도 있다. 퇴근할 때는 공항검색대 같은 곳을 지나서 스티커가 잘 붙어있는 지도 확인했고, 스티커 미부착 시에는 일종의 반성문도 쓰고 임원급의 결재도 받아야 했다. 보안점수가 임원의 MBO에 포함되어 있기도 할 정도로 보안에 대해서 예민한 곳이었다.
여기도 같은 회사니 당연하게도 입구에서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응? 스티커 스티커어! 이거 붙여줘야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면서 시큐리티한테 있으니까 저기 가서 붙이란다. 시큐리티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더니 케이스가 씌워진 채로 그 위에 스티커를 붙여준다. 응? 당황스럽다. 이렇게 붙이면 내가 핸드폰 케이스만 벗기면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지금 이거 나만 예민한 거야?? 여기선 이렇게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한단다. 같은 회사인데 우리는 보안에 그렇게 목숨 걸더니 여기서는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건가? 여하튼 한국에서는 주말에 스티커를 뗐다가 월요일에 출근하면서 다시 붙이는 것도 귀찮고 혹시나 붙이는 걸 까먹으면 별도의 반출 절차도 걸쳐야 하는 등 신경 쓸 일들이 생겨서 아예 안 때고 살았다. 사진 찍을 일이 뭐 얼마나 있다고 매일 일상이 똑같은데. 그렇지만 여기서는 새로운 곳이니까 이것저것 사진 찍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스티커 신경 안 써도 돼서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보안에 신경을 안 쓰는 게 아니라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여기는 미국. 고소의 나라 아닌가. 어디 쓸데없는 사진 찍거나 정보유출하면 바로 "Security breach? Data leak? Okay. I’m suing you" 이거 하나면 아마 개인이 커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페널티가 나올 테니 웬만하면 쓸데없는 짓은 엄두도 내지 않을 것 같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음... 스티커 안 붙였어? 반성문 써와. 정도니까. 한번 혼나고 말지 뭐.
Main Fab 2층에 내가 일하고 출장자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이 있었다. 모든 미국 회사가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국에서 내 사무실과 이곳은 크게 두 가지가 달랐다.
첫 번째가 공간이다. 한국에서는 창문을 등지고 팀원들을 관조하듯 다른 자리들이 한눈에 보이는, 리더들이 있는 일명 창가자리와 나머지 인원들이 서로 등을 마주한 채 2열 종대로 쪼르륵 앉아있고 개인 캐비닛 겸 파티션으로 3면이 막혀있는 자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크게 파티션으로 다 둘러싸여 개인 공간이 확보된 Cubicle, 개별 데스크는 있지만 파티션 없이 뻥 뚫린 채로 한 구역에 팀원들이 모여 앉아 있는 Bullpen 두 가지 자리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출장자들은 모두 이 Bullpen에 모여 있었다. Bullpen에 있는 게 개인 공간을 희생하되 팀원 간에 쉽게 이야기하고 결속력이 더 좋았다. 이게 한국인들 정서에는 더 맞을지도?
두 번째가 바로 사무기기다. 일단 보급되어 있는 PC는 출장자들이 오가면서 쓰는 공용이어서 그런지 정말 구. 리. 다. 한국인이 쓰기에는 답답해서 복장 터지는 속도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감동받은 부분은 다른 것인데, 그것은 바로.... 모션 데스크와 허먼 밀러 체어였다. 의자 하나만 100만 원을 호가하는 허먼 밀러 체어가 오피스 모든 자리에 놓여있고, 한국에서는 디스크 진단서를 제출하고 수개월 기다려야 받는 높이도 애매하게 낮아서 오히려 불편한 간이 모션 데스크를 주는데 모든 자리에 모션 데스크라니. 사실 오기 전에 허리. 목 디스크가 심해져서 병원에서 신경약을 처방받아먹고 있었고 목 신경 다발 어디가 눌렸는지 오른팔이 저리고 아파서 30분을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신경약도 2달치를 처방받아 바리바리 싸왔는데, 이게 심리적인 건지도 모르겠지만 출장 기간 동안 단 한알의 약도 먹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통증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게 저 모션 데스크와 허먼 밀러 체어 덕이라고 확신한다. 한국으로 복귀한 이후 다시 약을 먹기 시작했거든.
첫날 오전은 별 일이 없었다. 업무 컴퓨터 세팅하고, conference call로 목소리만 듣던 local 들과 인사하고 루틴 한 회의에 참석하고(참관에 더 가까운) 모든 출장자가 나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미국의 첫 외식은 햄버거였고 'Hopdoddy'라는 곳으로 차 2대로 나누어 향했다.
20분쯤 달려 도착하니 아직 아무도 없다. 10분 20분이 더 지나도 나머지 한 대가 올 생각을 안 해서 전화를 해보니
"저희 라운드 락인데요?"
아뿔싸, 얘들은 같은 햄버거 가게 다른 지점에 가 있단다. 어쩔 수 없이 따로 식사를 했고, 이런 일은 출장기간 동안 두 번 더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모든 곳이 '라운드 락' 지점과 다른 곳이었다. 라운드 락이 문제구만.
첫 미국 음식의 인상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양이 어마무시 한 것과 짜다는 점이다. 세트로 시키려니 감자튀김은 하나만 시키면 된다고 한다. 음식을 받아 들고 알았다. 감자튀김을 양푼이에 퍼준다. 담아준다가 아니라 퍼 담아 줬다는 게 맞을 정도의 양이었다. 함께 준 탄산음료 뽑아먹으라는 컨테이너도 스타벅스 벤티 사이즈보다 1.5배는 컸다. 첫 감자튀김은 포슬포슬하고 바삭하고 너무 맛있었고 동시에 너무 짰다. 여기는 무슨 감자에도 염지를 하는 줄 알았다. 소금도 때려 붓고, 시즈닝도 때려 붓고 그러다 보니 한입 할 때마다 탄산을 한 모금해야 했다. 그래서 음료 컵도 큰 거 줬구나? 이유가 다 있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커피를 한잔 하자고 근처에 라테가 맛있는 곳이 있단다. 특히 아르바이트생이 자기 스타일이란다. 남자들끼리 그런 건 또 못 참지 낄낄 대며 도착한 곳에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덩치 좀 있으신 아주머니가 계셨다. 야 네가 저런 취향이었구나ㅋㅋㅋ 아무튼 그 다디단 문라테는 맛있었고 그 뒤로 두세 번 더 찾아갔지만 후배취향의 그 예쁘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밥 먹고 사무실에 왔더니 이미 1시가 다 되어 간다. 한국에서는 점심시간 1시간에 그 시간 동안 소등을 하는데, 여긴 별도로 정해진 게 없는 듯하다. 내가 늦게 오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자리에서 도시락 까먹으면서 일하는 애도 있고, 아무튼 편하게 자기 할 거 하고 있는 게 뭔가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신기한 게 도시락을 많이들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여기 구내식당도 있는데 굳이? 그리고 놀라운 식습관도 많이 봤다. 점심이라고 꺼낸 게 에너지드링크나 감자칩 같은 과자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다. 미국인들 덩치가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저녁도 외식을 했다. 함께 간 리더가 텍사스에 왔으니 BBQ를 맛봐야 한다고 괜찮은 가게를 안다고 초대하였다. 공짜 밥은 거절할 수 없지. 'The County Line'이라는 곳으로 Integration 멤버 총 5명이 모였다.
가게 뒤로는 작은 강이 있었고 카약인지 뭔지를 타고 낚싯대를 드리운 채 한적하게 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고 백조 같은 새도 떠다니고 있었다. 뭐랄까 삶의 여유 같은 게 느껴지는 장면을 뒤로하고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커다랗고 투박한 식전빵이 나왔고 그 뒤로 나온 내 플레이트에는 브리스킷과 폴드포크와 함께 샐러드 그리고 요리이름은 모르겠지만 pinto beans가 함께 나왔다. 내 첫 텍사스 BBQ는 너무 맛있고 부드러웠고(사실 시간이 지나고 유명한 BBQ집을 다녀보면서 이 맛은 거의 잊었다) 인상적인 건 저 콩요리였다. 일단 맛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저걸 먹고 있자니 마치 링컨 전에 독립운동 전 흑인들이 노예생활하면서 겨우 얻어먹던 밥 같았다. 모자를 가슴팍에 올리고 큰 눈을 굴리면서 아뭇것도 모릅니다요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저 콩요리는 출장 내내 웬만한 음식에 다 나오던데 끝까지 나는 손도 대지 않았다.
첫날은 먹기만 한 것 같지만 사실 이날은 내 출장의 방향을 바꾼 날이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벤트가 휩쓸었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