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도착했습니다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렇게 길게 외국을 가본 적이 없던 나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짐을 가져가야 하는지 고민했다. 캐리어는 몇 인치를 들고 가나, 2개를 들고 가는 건 너무 오버인가, 1개가 너무 없어 보이나,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다 결국 10주 치 짐을 꾸역꾸역 쑤셔 넣은 커다란 캐리어에는 대부분 버리고 올 각오를 한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이번 출장 인원은 나를 포함해 네 명. 출장 인원 중 가장 리더급의 TL, 나, 그리고 후배 둘이었다.
공항 라운지에서 함께 출장 가는 후배들과 만났다. 한 명은 나와 같은 초행길이었고, 한 명은 이미 한번 경험이 있었다. TL은 다른 비행 편으로 비즈니스클래스로 먼저 떠났다. 국적기라고는 신혼여행 때 한번 타본 게 전부인 나에게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마일리지 따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흥분되었다. 요즘 LCC는 기내식도 내 돈 내고 사 먹어야 하는데, 기내식 마니아인 나는 이코노미라도 기내식이 나오는 것에 신이 났다. 비행기에 타서 후배가 멜라토닌인가를 한 알씩 쥐어 주었다.
"이거 먹고 푹 자고 10시간 뒤에 만나시죠"
맥주 한 캔에 호로록 알약을 털어 넣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배 두 명은 죽은 듯이 잠들었고 밥 먹을 때 외에는 눈을 뜨고 있는 걸 보지 못했다. 나 또한 자다 깨다를 반복했지만, 그게 멜라토닌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좌석 모니터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 시즌1'을 전부 봤고, 두 번의 기내식과 스낵바를 실컷 즐겼다. 다행히도 비행기에는 빈 좌석이 많았고 뒤로 가 보니 이미 누워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 역시 비어있는 좌석 세 개를 차지해 누워서 세미 비즈니스를 즐겼다. 기장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 샌프란시스코다!
내 목적지인 텍사스 오스틴은 한국에서 직항이 없다. 미국 내 주요 허브 공항들을 경유해야 하는데, 출장 경험이 많은 후배들이 LA는 한사코 말렸다. 환승하는데 버스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해서 동선도 길고 복잡해서 힘들다고. 그래서 내가 고른 경유지는 샌프란시스코였다. 샌프란시스코 하면 골든게이트 브리지! 영화 더 락의 알카트라즈! 하지만 환승시간은 단 2시간. 내가 느낀 샌프란시스코는 공항 밖으로 잠시 나와 콧구멍에 쑤셔 넣은 공기와, 기념품 샵에서 집어온 마그넷 단 두 개가 전부였다.
환승하기 전 입국심사에서 비자와 상관없이 많은 질문들이 오갔다. 내가 안 돌아가고 불법 이민자로 남을까 봐 심히 걱정되는 관상이었나 보다. 무사히 심사를 마치고 짐을 다시 부쳤다. 다행히 환승시간은 충분했다. 출국 게이트 앞에서 내 비행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흑인 아저씨는 내가 좋아하는 존 레전드를 닮았다. 저 백인 아저씨는 어디 돈 많은 컨스트럭터인가. 저 인도인은 실리콘 벨리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일 거야. 벌목공 같은 털보 남자, 중국 이민자처럼 보이는 가족. 미디어에서나 보던 다양한 장면들이 각자의 언어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델타 항공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도 날개칸이다. 오히려 좋아! 양쪽으로 두 자리씩 있는 좌석 중 내 라인은 한 좌석만 있었다. 덕분에 마주친 뒷자리 백인 백발의 노부부와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미국에서 나눈 첫 대화는 특별한 것 없이 시시껄렁하게 지나갔다. 델타항공 승무원 아주머니는 카리스마가 엄청났다. 한국 항공사라면 상상하기 힘든 강렬한 캐릭터였다. 아니 애초에 저 나이의 승무원분이 기내에 안타는 거 같은데. 기내 난동이라도 부리면 저 아주머니가 바로 귀싸대기를 날릴 것 같은 포스였다. 그리고 그 비행기는 정말 정말 추웠다. 초등학생처럼 반팔 안으로 팔을 다 집어넣은 채로 오들오들 떨다 보니 어느새 오스틴에 도착했다. 출발한 지 대략 17시간 만이었다.
오스틴 공항에서 짐을 찾고 반가운 얼굴들을 맞이했다. 기존 출장자들과 약 1주일의 오버랩 기간이 있었는데, 다음 출장자들이 오면 이렇게 공항으로 마중 나오는 전통 아닌 전통이 있단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타지에서 아는 얼굴을 보니 그렇게 반갑더라. 인사도 잠시, 바로 렌터카를 받으러 갔다. 공항 문을 열고 나오자 건조하고 더운 공기가 훅 들어왔다. 9월 초였는데 요즘은 선선해지고 있다고 한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주차장과 연결된 Hertz를 향했다. 여기서 운이 판가름 난다. 듣은 바로는 내가 콤팩트를 선택하든 미드쉽을 선택하든 직급이나 내 멤버십 등급과 아무런 상관없이 그냥 랜덤 하게 주는 차를 가져간단다. 누군가는 이제 한국에서는 보기도 힘든 수동 키를 꽂아 돌려서 시동을 켜는 차를 받았다고 했고, 누군가는 1000마일도 안 탄 신형을 받았다고 한다. SUV를 받는 사람도 있고 세단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똥손이다. 에라 8만 마일을 탄 회색 닛산 알티마. 머슬카와 픽업트럭의 본고장인 미국이기에 내 머릿속의 미국차는 포드 랩터, 머스탱, GMC 시에라, 닷지 이런 것들이었는데, 그건 미국인들이고 외노자인 나에게 허락되는 렌터카에는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 일하러 온 거지 차 자랑하려고 온 것도 아니잖아.
미국 운전이 처음이라 후배가 대신 회사까지 운전하겠다고 한다. 그러려고 온 거란다. 나와 같이 출장 온 후배들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기존 출장자들이 회사까지 운전을 해주었다. 첫 오스틴의 밤 운전은 한마디로 '어둡다'였다. 한국처럼 여기저기 가로등이 촘촘하게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시내가 아니라서기도 하겠지만 정말 해 떨어진 깡 시골마을처럼 어두운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하이빔을 켜고 달린다. 야.. 이거 한국이면 하이빔 켰다고 멱살잡이 했을 텐데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만큼 어두웠다. 그리고 커다란 픽업트럭들이 뿜어내는 라이트는 일반 등조차 나를 향해 하이빔처럼 눈뽕을 쏘고 있었다.
회사에 도착했다. 각자 차를 여기 주차해 놓고 차 한 대로 공항에 마중 나온 거라 여기서부터는 각자 운전해서 숙소로 간다. 동/호수만 다르고 모두 같은 곳이었다. 회사에서 숙소는 차로 5분도 안 걸리는 곳이다. 운이 나쁘면(?) 출퇴근이 노래 한곡이 끝나기 전에 완료되는 거리였지만 그날은 굉장히 조심조심 후배 꽁무니를 따라갔다. 미국에서 첫 운전이었다. 낯선다 못해 생경했다. 룸미러와 왼쪽 사이드미러가 확대경이었고 오른쪽만 한국처럼 일반 미러였다. 거리감이 이상해졌다. 모든 표기가 마일이다. 내가 지금 몇 km로 달리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주차도 전면 주차가 기본이었다. 대부분 후면 주차가 디폴트인 한국인인에게는 이게 오히려 더 어려웠다. 후배가 숙소 주차에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고 했다. 후드가 쳐진 곳은 유료고 거기에 주차하면 바로 견인해 간단다. 같은 아파트에서 유료, 무료 주차 구역이 구분되어 있다니. 미국.. 자본주의.. 와.. 교통 법규나 신호도 달랐는데 이 부분은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바로 저녁식사를 하러 한 방에 모였다. 출장자가 오면 이렇게 방에 모여서 조촐하게 다 같이 밥을 먹곤 한단다. 주재원과 1년짜리 장기 파견 와 있는 인원도 함께 와있었다. 일면식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아예 회사에서 말 한번 섞어보지 못한 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아웃사이더여서 인지 대면대면했지만 또 반갑기도 했다. 그렇게 내 미국 첫 식사는 '파파이스'로 시작했다.
맥주를 까기 시작한 녀석들은 모두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해댔다. 나는 술을 먹지 않는다. 술자리도 기피하는 편이다. 무언가 어색하다. 내가 빠져주는 게 얘들도 편할 것이다. 20-30대 젊은 청년들 사이에 40을 바라보는 아저씨가 껴 있는 게 얼마나 불편하겠어. 피곤하다는 핑계로 먼저 나왔다. 내 방을 찾아가는 길 숙소 전경이 보인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런 곳을 Apartment Complex라고 부른단다. 4층짜리 다세대 건물이 6개 동이 있었고 중간에 커뮤니티 센터와 헬스장, 테니스 코트, 그리고 야외 수영장에 선베드, BBQ장까지. 첫인상이 매우 훌륭했다.
5305호. 앞으로 10주간 머물 곳이다. 두 명이 한 아파트에서 주방과 거실만 공유하고 화장실, 침실이 각각 따로였다. 방에 들어가니 바닥이 카펫이다. 책상 위에 웰컴 레터와 키트가 있었다. 얼마 전부터 생겼다고 한다. 4 햇반, 2 신라면, 2 오뚜기라면(생전 처음 봄), 스팸, 코스트코 참치캔, 2 봉지김, 두산김치(두산이 김치도 만들다니.. 내가 아는 그 두산이 맞나), 설렁탕. 구성이 아주 알차다. 침실 옆 팬트리인지 드레스룸인지에 짐을 풀었다. 옷 걸어두는 곳도 많고 공간도 넓었다. 미국은 다 이런 건가. 옷장이 없고 아예 방이 있는 게 신기했다. 별도의 에어컨이 있는 게 아니라 화장실처럼 공조기에서 찬 바람이 나오는 형식이었고 천장에는 커다란 팬이 있었다. 얼마 전 무인양품에서 산 여름 이불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굳이 여기까지 가지고 왔다. 가져오길 잘했다. 부들부들 하구만. 씻고 누우니 슬슬 피로가 밀려왔다.
내일부터 바로 출근이다. 내일은 첫 출근이라 보안 허가랑 출입 등록 때문에 후배와 같이 출근하기로 했다. 8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시간은 넉넉하다. 지금 한국은 아침이려나. 서머타임 때문에 14시간인지 16시간인지 시차가 있다고 했다. 시차 적응 안 돼서 못 자면 어쩌나 라는 걱정이 무색하게 곧바로 기절해 버렸다.
눈을 뜨니 새벽 4시 반. 이상하게도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상시간이 똑같다. 침대에서 내려오니 폭신한 카펫이다. 한국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느낌이다. 여럿이 머물다 간 카펫이니 분명 더러울 것이다. 그래도 그 위에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널브러졌다. 이상하다. 무언가 포근하다. 커뮤니티에 있는 무료 헬스장을 향했다. 새벽 5시 헬스장에는 후디를 덮어쓰고 헤드셋을 낀 히스패닉 한 명뿐이었다. 미국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과도 눈이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한다던데, 우리는 서로 대면대면했다.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10주 동안 만난 그와는 "Hola! Buenos dias" 인사말 이상 관계가 발전되지는 않았다.
아침 8시. 드디어 첫 출근이다. 운전해서 들어가는데 회사 정문에 시큐리티들에게 창문 너머로 사원증을 들이대니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용기를 내어 따봉을 날렸다. 정확히는 안녕하세요~ 고개도 같이 꾸벅하며 엄지를 들어 올리는 묘한 인사를 했다. 다행히 시큐리티도 같이 따봉을 날려준다. 기분이 좋았다. 주차를 하고 로비를 향해 걸어가는데, 정말 외국인들이 우르르 지나간다. 하나같이 앞사람들이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준다. 나는 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문을 잡고 기다려준다. 조급히진 나는 괜스레 뛰어들어가 또 한 번 고개를 꾸벅하면서 Thank you.... 를 소심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나도 자연스레 내 뒤에 사람이 있나 보았다. 저기 한 명 발견! Good morning, man. 아.. 근데 이 거리는 잡아줘야 되나, 그냥 가도 되는 건가. 가늠이 안된다. 익숙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불편한 것도 없었다. 오히려 신기하고 새로웠고 기대됐다.
낯선 공기, 낯선 규칙,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은 모든 게 흥미진진한 상태로
그렇게 미국 출장의 첫날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