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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이루리 glory Jul 21. 2024

더 천천히, 쉬엄쉬엄 가길...

 -나무에서 배우는 느림의 미학

 어제는 작은 아이의 미술 실기고사가 있어 아침 일찍부터 준비를 하고 나왔다. 딸아이는 늦지 않게 일찍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가 간단히 해 놓은  에그스크램블에는 손도 못 대고 머리만 감고 나온 것 같았다. 시험을 보기 전에는 초긴장 상태라서 말 한마디 건네기도 힘들어 왜 시간을 더 내어 한 술이라도 먹지 못했냐는 타박도 못했다. 경희대에서 보는 실기시험은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관문이다. 실기 시험에서 수상실적이 있어야 해당 대학을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입시 전형이 바뀌지만, 2학년 때 실기시험을 미리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해서 지원해 놓은 터였다. 딸아이는 길눈이 어두워 길을 헤매는 엄마가 못 미더워 미리 주차장 위치며, 미술대학까지 올라가는 동선까지 다 챙겨 놓고 꽤 높은 곳인데 화구며 짐을 가지고 올라가야 한다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짐을 들어주는 것 밖에 없었으므로 호기롭게 짐짝 같은 가방을 둘러매고 미대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장맛비가 내린 후의 습한 기운이 훅 몰려오면서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졌지만 관광대 건물을 지나서 산을 걸어 올라가는 길은 벚나무와 키 큰 나무들이 우거져 꽤 아늑하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린 후라 맑은 계곡물이 물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려 마치 국립공원을 거닐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무렵, 어느덧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미대 건물에 다다랐다. 힘들다 투덜거리는 아이를 달래서 들여보내고 다시 천천히 산길을 따라 걸어 내려왔다. 4시간 동안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제일 가파르고 높다는 미대 오르막길을 제외하고는 한여름의 땡볕 아래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교정을 돌아다니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다행히 대학 측에서 학부모 대기실을 마련해 놓아서 편안히 다과를 즐기면서 오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인터넷이 안 되는 LG pro 구폰을 쓰고 있으므로,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수는 없었다. 미리 챙겨 온 책을 꺼내놓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책을 집중해서 읽다 보니 가져온 책 한 권을 한 시간도 안되어 다 읽었다. 어쩌지... 시간을 이렇게 길게 보낼 수도 있구나. 잠시 바깥을 서성이다 보니 대학 매점 옆에 작은 서점이 있었다. 베스트셀러 신작들도 펼쳐 볼 수 있어서 이 책 저 책 읽다 보니 30분이 지났다. 다시 대기실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궁금했다. 옆의 분은 벤치 손잡이 부분에 탑재되어 있던 책상을 펼쳐놓고 핸드폰을 세워 놓은 채 유튜브를 본격적으로 시청하고 계셨다. 나는 그걸 몰라서 내내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느라 목이 아팠는데 좀 속상했다. 앞의 아빠 몇 분은 잠을 자면서 피곤함을 푸는 듯했고, 뒤에 여자 두 분은 아까부터 아이들 얘기를 끝없이 속닥이며 하고 있었고, 부부가 정답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나름대로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나는 더디게 지나가는 이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아까 읽었던 책들도 다 깊이 새겨져 들어왔으므로 머릿속에는 어떤 글을 쓸지, 파노라마처럼 이야기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조용히 노트에 쓰고 싶은 말들을 적어 보았다. 두서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삶에 대한 소소한 고민들이 녹아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글을 쓰는 것은 읽는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내 생각을 꺼내 놓아야 하기 때문일까. 훅 하고 지나간 시간의 가벼움에 놀라면서 시험이 끝나기 30분 전에는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또다시 산길을 따라 미대 건물로 향했다. 나뭇잎에 걸쳐 반짝이는 햇살과 미세하게 더운 열기를 뚫고 불어오는 산바람을 느껴보려고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면서 걸어가는데 아침에 수능시계를 팔던 아주머니들께서 산 중턱에 앉아 하하 호호 웃으면서 망중한을 보내고 있다. 다들 점심으로 뭘 먹을지, 더우니 이 쪽에 와서 앉으라 하면서 서로를 챙겨주는데 한 할머니 한 분만 멀찍이 떨어져 앉아 계셨다. 걸어 올라가는 길에 그 할머니의 엉덩이를 향해 돌진하는 산개미를 잡아서 치워 드렸더니 활짝 웃으시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신다.  

"산개미 물면 아프다니 조심하세요." 나도 웃으면서 가던 길을 걸어갔다. 


 가파른 산책로를 오르니 큰 나무들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나무와 그 뒤에 이끼가 나무 밑동부터 타고 올라온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앞의 나무가 시원한 그늘과 양분을 내어 주고 뒤의 이끼는 나무에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 주면서 오랫동안 공생해 왔을 나무와 이끼의 관계가 부럽다. 한 번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교감해 보고 싶었지만 울타리가 있어 더 깊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다 나무 사이에 내 눈을 의심하는 만드는 녀석을 발견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계곡 아래 시원한 바위에 배를 깔고 앉아 누워 있다. 자고 있나 한참을 자세히 봤더니 눈을 뜨고 미동도 없이 앞의 바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 닦는 고양이를 목격하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시원한 곳을 찾아 여기까지 왔을 녀석의 영민함과 여유로움, 지켜보는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당당함에 웃음이 나왔다. 


 원초적이고 단순하게 사는 너의 삶이, 삶에 쫓기면서 사는 우리 삶보다 더 나을 수도 있겠구나. 작년에 미술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면서 차라리 집 앞에 편히 누워있는 고양이가 부럽다 했던 딸아이의 말이 생각났다. 단 1분도 아깝고, 조금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바둥대야 하는 삶을 내 딸도 살고 있었다. 나는 불지옥 같은 현실에 아이를 밀어 넣은 장본인이므로 별다른 대책을 마련해 줄 수가 없었다. 늘 시간을 잘 활용해라, 더 아끼라 다그치기만 했던 것 같다.


 자연은 녹색이 회복탄력성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계곡물이 산줄기를 타고 졸졸 흐르는 소리, 산들거리는 바람소리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준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오감으로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로 인해 누적되었던 피로감이 저하되면서 삶에 대한 희망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한다. 나무는 우리에게 안전하다고 알려주는 녹색신호등과 같은 역할을 해준다. 오랜만에 느리게 걸으면서 몸과 마음이 회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무는 삶에 지치고 힘겨울 때, 가끔씩은 서두르지 말고 그 자리에 머물면서 천천히 쉬면서 가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아무리 바쁘게 빨리 간다 해도 결국 한 끝 차이임을 한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고목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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