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암도랑의 가을

by 서건택

마을 끝을 감싸 흐르는 평암도랑은

내 어린 날의 시간줄기였다.

봄이면 그 물결 위로 햇살이 반짝이며

은비늘처럼 부서졌고,

여름이면 풀잎 냄새와 물비린내가 뒤섞여 세상이 한껏 숨을 들이마신 듯 싱그러웠다.


도랑 둔덕에는 강아지풀이 꼬리를 흔들며 바람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고, 그 사이로 토끼풀이 하얀 손수건 같은 꽃을 내밀어

지나가는 벌과 나비의 이마에 인사를 건넸다.

조금 더 내려가면 여뀌는 붉은 빛 이삭을 흔들며 가을의 첫 숨결을 예고했고, 미나리는 물 위에 발끝을 담근 채 하루 종일 초록빛 세수를 하며

물소리의 리듬에 몸을 맡기곤 했다.


그때 나는 도랑의 아들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맨발로 물속을 뛰어다니며 송사리, 미꾸라지, 피라미를 좇았다. 돌 틈에 손을 넣다 찬 물결이 스며들면 그 차가움이 곧 웃음이 되었고,

웃음은 다시 물결이 되어 도랑 끝까지 흘러갔다.

작은 손으로 돌을 쌓아 물길을 막으면

그 속에 고인 물은 마치 내 세상의 바다 같았다.


해질 무렵이면 물 위로 감잎이 떨어졌다.

감잎은 한 장, 두 장 붉은 배를 타고 떠내려가며 마치 세월의 편지를 띄우는 듯했다.

멀리 감나무 가지마다 주황빛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리고, 그 빛은 저녁놀과 섞여 온 마을을 따스한 등불로 물들였다.

감빛이 번지는 그 시간,

도랑의 물소리마저도 달콤하게 익어갔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그 도랑을 따라 걷는 중년의 나그네가 되었다.

도랑은 여전히 졸졸 흐르지만

그 속을 뛰놀던 내 그림자는 더 이상 없다.

대신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때의 나를 흉내 내고,

토끼풀이 잎을 흔들어 옛날의 웃음소리를 대신 전해 준다.


감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해마다 잎은 늙어 떨어지지만,

그 열매는 어김없이 붉게 익어

“나 여기 있다” 하고 속삭인다.

가을마다 그 나무 아래 서면

내 유년의 시간들이 도랑물처럼 졸졸 흐른다.

그 물소리는 오늘도 내 마음의 밭을 적시고, 나는 그 도랑의 아이였던 기억 하나로 지금 이 가을도 살아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