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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아재 Dec 09. 2021

무라카와와 이강재

그 시절, 내가 사랑한 그들에게


급성 간염에 걸렸다.

잘 못 먹고 잘 못 자다가 결국 탈이 난 게다.

아슬아슬했던 20대를 뒤로하고 맞이한 서른은

작년보다 더욱 아슬했고, 아슬했던 줄다리기는

12월이 되어서 나를 병원 다인실에 구겨 넣게 만들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짐짓 진지하게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조건 휴식하라.” 고.



뭐, 나름 괜찮다. 그동안 결제만 해두고 [활용] 하지 못했던 넷플릭스와 왓챠를 꺼내 볼 시간이다.

나중에 보려고 찜해두었던 리스트들 중 스크롤을 멈추게 한 작품이 있었다.


소나티네(Sonachine, 1993)

개인적으로 일본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일본 하면 떠오르는 감독이 이마무라 쇼헤이여서 그럴까, 아니면 인간의 오욕과 추악함을 여과 없이 담은 ‘복수는 나의 것’이나 ‘나라야마 부시코’ 같은 그의 대표작이 줬던 거부감이었을까.


그리고 스크린까지 잠식한 애니메이션 시장으로 인해 B급도 안 되는 필름들을 쏟아내던 암흑기가 나의 성장기와 맞물렸기에 나는 더더욱 일본 영화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술자리에서 우연히 일본 영화에 대한 술주정이 오고 갔고, 그 자리에 있던 지인이 나에게 던졌던 감독의 이름은 그 술자리와 지인의 얼굴은 지웠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에 키워드로 남게 되었다.


‘기타노 타케시’

나에게는 자토이치 아저씨로 친숙한 배우(인 줄 알았다.)였다. 그분의 필모그래피를 보던 중 낯익은 사진과 함께 기재되어있는 제목을 읽었다.


소나티네. 작은 소나타. 과연 기타노는 나에게 악장별로 어떠한 메시지를 연주하고 싶었을까.


영화의 내용은 놀라우리만치 간단했다.

서열싸움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좌천되었던 주인공이 모든 걸 시원하게 밀어버리는 전형적인 80년대 야쿠자 누아르.

기타노 타케시는 생각보다 역설적이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탈하게 걷는 그의 모습과 눈빛은 죽음을 통해 삶을 초월하려는 듯 보였다.


폭력이라는 주제를 풀어냄에 있어 빠질 수 없는 감독이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와 박찬욱 아닐까.

타란티노와 박찬욱의 폭력은 막연한 동경이 내재된 본능적 일탈이라면

타케시의 폭력은 날것 그 자체를 무서울 정도로 응시하는 시선 그 자체였다.

또 다른 시각을 접함에 있어 즐거웠고, 90년대 일본이기에 만들어지는 서투름조차도 즐거운 러닝타임이었다.


근데 이 작품.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또 다른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 영화. 무언가 친숙하고. 무언가 아련하다.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지 않고 갈 수 없는 90년대 오키나와를 그리워하게끔 한다.


마치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처럼.



파이란(Failan, 2001)

동네 양아치 강재는 위장 결혼했던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아내의 거주지였던 강원도 동해로 떠나게 된다. 거기서 마주하게 된 아내의 생활과 진심에서 무언가를 느끼는 강재.


영화배우 최민식이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애착이 간다는 작품. 2000년대 초 인천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가슴 뜨끈한 남자의 로맨스다.


두 영화는 몇 공통점이 있었다.

- 얼핏 보면 건달 영화이지만, 러닝타임이 갈수록 다른 장르의 영화다.


‘파이란’의 첫 시퀀스는 오락실에서 삥이나 뜯고 어린 학생 뒤통수나 때리며 담배 뜯는 양아치 강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 씬으로 강재가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설명해주며, 처음 볼 때 내 심정은 ‘ 또 그저 그런 건달 영화구나.’라는 지루함이었다.


‘소나티네’ 역시 도쿄에서 야쿠자 짓을 일삼는 무라카와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중기로 사람을 매달아 물에 빠뜨려 죽인다던가, 수틀리면 대화보단 주먹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며 뻔한 클리셰이지만, 건조한 표정과 초점 없는 지루한 눈동자가 조금 흥미로울 정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두 영화는 뻔하디 뻔한 건달 영화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잔잔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을 너무 선명하게 담아내어 엔딩 크레디트를 볼 때면 환자 신분을 잊은 채 담배를 찾을 뻔했으니 말이다.


- 그 시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대별 작품을 보게 되면 그 시절 풍경을 찾아보는 재미가 훌륭하다.


‘중경삼림’이나 ‘아비정전’에서 느낄 수 있는 80년대 홍콩의 밤처럼


‘파이란’을 보고 있으면 나 꼬꼬마 시절 동네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던 그 동네가 보인다. 가파른 언덕에 거미줄처럼 쳐진 골목들, 골목 중간에 자리 잡은 평상 있는 슈퍼마켙까지. 어릴 적 살던 집을 나와 학교까지 뛰어가며 맡았던 골목 냄새가 문득 나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와는 반대로 ‘소나티네’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90년대 초 오키나와와 도쿄를 담고 있다. 도시와 시골을 병리 배치하여 극적 대비를 주었던 점도 인상 깊었고 시골에서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어린아이 마냥 장난치며 노는 씬에서는 알 수 없는 아련함마저 풍기게 했다. 나도 모르게 영화가 끝나고 도요타 크라운이나 닛산 실비아 매물이 있는지 검색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은 분명 있다. 단순히 감독의

타임라인대로 감정을 이끄는 힘이 아니라,

단순한 미장센 하나에서 오는 감정들은 감독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지만 각 관객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영화가 주는 힘이라고 본다.  

그 시대가 주는 향수와 기억. 거기에서 오는 또 다른 감정들이 그리워 나는 앞으로도 이런 작품들을 몇 번이고 꺼내 볼 테지.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그들을 떠올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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