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길
엄마가 췌장암으로 이 세상을 떠난 후, 난 이 사실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선택하길 원한다. 편안하고 의미 있는 죽음. 죽음을 겪고 나서 그 경험을 전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에 만족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누구나 죽기 직전에 자신의 삶과 죽음 사이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태어난 김에 산다는 게 나에겐 아주 공감되는 말이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지금 결혼하고 아들이 태어난 지금도 어느 정도는 공감되는 말이다. 특별한 의미도 목표도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렇게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쓰면서 자꾸만 키보드로 끄적이는 것만 봐도 그렇다. 예전에도 지금도, 특별한 인생의 의미를 찾긴 힘들다.
사람마다 인생의 의미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지금 다시 계몽”이라는 책에서 작가인 스티븐 핑커 교수가 한 말이 나에겐 가장 인상 깊었다. 자신의 학생에게 받은 질문이었는데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우리 인간은 지각을 가진 존재로서 학습과 토론을 하면서 이성이라는 능력 자체를 멋지게 다듬을 수 있다. 과학을 통해서 자연계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있고, 예술과 인문학을 통해서 인간 조건을 통찰할 수도 있다. 쾌감과 만족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도 있다. 그 능력 덕분에 우리 조상들이 번성했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계와 문화계의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감상할 수 있고, 수십억 년 동안 이어져 온 생명의 상속인으로서 그 생명을 물려줄 수도 있다.
공감이라는 느낌, 즉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도와주고 친절을 베푸는 능력을 부여받았으니 친구, 가족, 동료들과 즐겁게 호의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성이 일러 주듯이 이 모든 것은 나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 자신이 누릴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을 남들에게도 제공해 줄 책임이 있다. 삶, 건강, 지식, 자유, 풍족함, 안전, 아름다움, 평화를 증진해서 지각력을 가진 다른 존재의 복지를 향상할 수도 있다. 역사가 가르쳐 주듯이 타인들을 동정하고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일에 우리의 재능을 쓸 때 우리는 진보할 수 있고 그 진보가 멈추지 않게 일조할 수 있다.”
이 대답 그대로 거창하게 실천할 자신은 없다. 그저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소중한 주위 사람들만이라도, 그들의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내 재능을 쓰고, 경험을 전달하고, 함께 공유하고 싶다. 그것이 내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해보니 어느 정도는 보람 있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부터 난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의식적으로 개인에서 가족으로 친구로 사회생활로 확장하며 순위를 매기곤 했다. 내가 행복해야 가족도 행복하고, 가족이 행복해야 친구와 회사 동료와의 관계도 좋게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생각에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선택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엄마의 사망 선고를 들으며 후회로 벅차오르던 눈물이 터져버렸던 그 순간이 아직도 계속 반복해서 떠오른다.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지만 하찮은 이유로 날려버린 그 소중한 엄마와의 시간들이 나를 계속해서 괴롭히는 것 같다. 돈, 명예처럼 사회가 재단해 놓은 가치를 얻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았던 그 모든 것들이 엄마의 죽음 앞에서는 모두 후회가 되어 버렸다. 많은 돈과 명예로운 직업은 결국 내 소중한 사람들과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그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그때서야 그것들이 하찮은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돈과 명예나 그 어떤 가치 있는 것일지라도 옆에 소중한 사람이 없다면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을 지금은 잘 알고 있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에서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홀연 여행을 떠난다.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여러 사람을 만나며 자연 속에서 진짜 인생을 배우게 된다. 고난의 연속이지만 마냥 행복해 보이는 그의 여행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여행의 끝에서, 그는 홀로 마지막 메모를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 행복은 함께 나눌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 여행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진짜 행복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영화가 끝난 뒤의 그 먹먹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실제 인물인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의 메모와 그 흔적을 통해 1993년 미국 아웃도어 잡지에 실린 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행복을 함께 나누고 인생을 어떻게 살지 선택할 수 있는 시기는 분명 나 자신이 살아있을 때뿐이다. 그리고 살아있음을 가장 잘 느낄 때는 지금이다. 나 자신에 집중하고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도 바로 지금이다. 아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방학이 몇 번이나 남았는가? 자기 전 아들과 함께 동화책이나 히어로 영화 얘기를 할 수 있는 밤은 얼마나 계속될 수 있을까? 부모들이 흔히 말하는, 지겨울 정도로 듣던 넋두리가 문득 생각난다. “자식 크는 보는 재미로 산다”. 이 평범하지만 소소한 재미와 추억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죽음은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선택할 수 있다. 죽기 직전, 이만하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고 즐겁게 살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인생. 선택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알 수 없는 미래를 고민하거나 과한 욕심을 부리며 악착같이 살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나 내 삶의 의미는 특별할 게 없는 바로 지금이다. 다행히 지금 세상은 과거에 비해 삶과 죽음, 건강과 편의 면에서 살기 좋은 시대이고, 그것에 감사해하며 소중한 사람들과 가능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에, 현재를 지속 가능하도록 하는 사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며 최악의 선택만은 피할 수 있는 인사이트를 갖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한다. 돈과 명예보다는 가족과 사회에 필요한 구성원이 되는 것을 택하겠다. 그러면 많은 부와 명예는 얻지 못할지라도, 많은 시간을 소중한 사람들과 나를 위해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선택이 아니라 바람이지만, 내 죽음의 순간에는 내 소중한 사람들이 아무도 옆에 없었으면 좋겠다. 주위에 아무도 없이 편안하고 고통 없는 죽음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이건 내 선택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뭐라 불평할 생각은 없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고, 그럴 기회가 있다면 매우 감사해할 것이다. 만약 죽기 직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다면 내가 너무 그들과 떠나기 싫어 추한 모습을 보일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죽음은 아름답지 않고 슬픈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지가 않다. 세상에 아름다운 죽음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옆에서 죽음의 순간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죽음을 미화해서 말할 수 있겠지만, 나를 포함한 직접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이들은 대부분 내 말에 공감할 것이다. 다만 죽은 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죽기 직전 옆에 있는 이들은 서로 아끼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직접 보는 죽음은 잊지 못할 슬픔이다. 내가 죽은 뒤, 내 소중한 사람들이 나를 생각할 때, 슬픈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랐으면 좋겠다.
물론 슬픔도 자신이 갖고 있는 소중한 감정 중 하나이고, 그런 슬픈 기억들도 추억이 되어 자신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다른 관점의 생각도 있기에, 내 주위 일들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알고 있다. 선택할 수 없는 건 죽음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마음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내가 다른 사람의 슬픔을 원치 않는다고 그들의 선택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을 잘 알고 나의 인생에 의미가 될만한 일들을 매 순간 바로 지금 선택하는 것이다.
나 자신만이 내 삶의 갈래길에서 어떤 길을 갈지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 하나하나가 인생이라 불리는 한 사람의 길을 만든다. 그 길의 끝에서 지난 길을 돌아보며 웃을 수 있을 것인지, 후회할 것인지 정해질 것이다. 내 선택으로 만든 길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오솔길이었을 수도 있고, 황량한 아스팔트 길이었을 수도 있다. 짧지만 추억으로 가득했을 수도, 길지만 앞만 보며 달려가 목적지에 빨리 도착했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달라 도착지는 제각각이겠지만, 결국 죽음이라 적힌 표지판은 모든 길의 끝에 있다. 이 인생의 막다른 길 끝에 도착해서야만 내 선택이 만족스러운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앞으로 내가 선택할 길은 아스팔트보다는 오솔길이 많을 것이다. 경험상 아스팔트 길에서의 추억은 교통체증, 로드킬, 몰상식한 운전자 등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없는 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