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은 전염성이 강한 역병이고, 연로는 처방전이다.

Taxiing

by Glycerol Repository

아담과 이브는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이며,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계통이 다름에도 공존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누구나 아는 인물이다. 그들은 절대자와 같은 능력을 갖고 동등한 존재가 되기 위한 욕망에 눈이 멀어 선악과를 먹고, 그 후 각자의 알몸에 부끄러움을 느껴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절대자는 당신의 전지전능함에 도전한다고 느껴 아담과 이브에게 책망을 한다.


책망을 하던 중, 아담은 이브가 먼저 건네주었다고 말하고, 이브는 그를 또 뱀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라 설명한다. 그럼에도 성경에서는 그에 대한 형벌로 여자에게 출산의 고통과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 거라는 저주를 내렸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고대 로마가 멸망하기 이전까지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법에 규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위 내용을 어린 시절 성경 공부를 하며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자연스레 본 내용을 접하였고 그로 인한 나의 감상평은 이러했다. 읽기만 해도 얼마나 고루하고, 짜증 나는 전개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짜증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알고, 남을 신경 쓰고, 영원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그깟 사과 때문이란 말인가.


위 내용을 읽자마자 나의 마음속에는 짜증이 일었다. 불평등함, 내가 선악과를 먹을지 말지 여부를 선택할 수 없는 그 불평등함 말이다. 또, 왜 아담과 이브는 멍청하게 뱀의 꾐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었을까부터, 절대자는 어째서 이러한 결말을 예상하지 못하고 대비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인자하지 못한가 까지. 이러한 짜증은 글을 읽는 동안 사용한 나의 오감 중 시각만을 통해 발생했다.


1990년대 초반의 우리는 누군가와 소통하지 않고 혼자 있어야 하는 상황이 종종 있었고, 혼자 있을 때 괜한 일로 짜증이 났었는지 과거를 회상해 보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어려서 짜증이 없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현재 2020년대 성인이 된 우리는 혼자 무언가를 하는 상황에 그리 쉽게 놓이지 않는다.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우리의 세상에 있는 여러 종류의 짜증들은 모두 타인으로부터 전염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나는 세상의 짜증은 총량이 정해져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로는, 나 혹은 당신처럼 짜증을 표출하는 사람만 존재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견유주의적인 편에 속하고, 사회에서 제공되어지는 서비스에 대한 표준화를 지나치게 요구하는 사람이다. 서비스의 표준화라는 건, 우리가 제공받는 서비스가 사람의 인종, 종교적, 정치적인 조건에 의해 차이를 두지 않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세상은 어떠한가, 내가 건강히 잘 살고 있는 것, 당신이 맨해튼 센트럴파크가 보이는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것, 그리고 또 누군가 성대한 결혼식과 잔치를 할 수 있는 것, 이 모든 요소들로부터 누군가는 불평등을 느끼거나, 누군가는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감정을 가진 개인들로부터 제공되어지는 서비스는 표준화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표준화되지 못한 세상에 많은 짜증을 표출한다.


이런 세세한 예가 아니더라도, 먼 거리에 있는 상대방의 작은 행동만으로도 짜증이 발생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서울에 만약 살고 있다면, 출퇴근 시간의 일원로, 서초중앙로 등을 운전하다가 운전이 서툴러서이든, 내비게이션이 당신을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였서든, 빠른 길로 가기 위해서든 우리는 차선을 필연적으로 변경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렇지만 본인의 앞을 고스란히 양보해야만 하는 나의 뒷 차주의 머릿속은 절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급기야 뒷 차주의 엄지가 경적을 울리는 핸들의 특정 위치에 아주 약한 힘을 3초 간만 주는 행위만으로도, 차선을 변경하려는 차 안의 나와, 거리를 걷는 보행자에게 짜증을 전염시킬 것이다. 이는 상대방이 차 안에 있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원거리에서의 상대방의 자그마한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소음들로 인해 오감 중 청각을 통해 짜증이 전염되는 방식이다.


우리는 그런 짜증 전염병에 완전한 면역을 갖고 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아마 두 종류의 사람이 아닐까 조심스래 생각해 본다.


첫 번째로는, 매사에 달관한 듯한, 초연한 사람은 짜증을 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민망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모르긴 몰라도 나는 그 사람들을 동정한다. '살아 있음을 느끼긴 할까' 라며.


두 번째로는, 짜증을 내는 게 무의미 한 걸 후천적으로 깨달은 사람이다. 이는 Nirvana, 즉, 번뇌의 소멸과 해탈의 경지에 오른 자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경의를 표하며 나 또한 앞서 말했던 짜증의 총량을 제어하기 위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열반에 오르기 위해 머리를 비우는 갖은 논리 구조를 짜는 등 연습을 한다.


그렇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며 결국 성장을 하거나, 무뎌지거나, 생존전략으로서 짜증을 포함한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변해간다.


어쩌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것도, 절대자가 인자하지 않았던 이유도 개인에게 성장할 수 있는 배경과 성장하며 얻을 성취감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네 짜증은 남으로부터 전염 할 수 있어도, 우리는 정신과 시간이 성숙해져 감에 따라 전염에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 않도록 인위 선택 진화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