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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덕여 Feb 22. 2023

이와이 슌지와 재즈에 대한 갑자기 떠오른 이야기들

2023년 2월

1.

 이와이 슌지. 내 영화 세계가 탄생한 계기는 이와이 슌지였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이 있었고 <피크닉>이 있었으며, <언두>가 있었다.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의 감수성은 나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상황과는 모순된 '태양의 따스함'이 있었고 '중2병'에 걸린 나는 그 속에 있었다.


 하나와 앨리스부터 였던가 나는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더 이상 '찾아'보지 않았다. 물론 그가 제작자로서의 역할에 더욱 기울였던 이유도 있었지만, 더 이상 그의 영화는 젊음의 표상을 이야기 하기보단 젊음의 표면을 그저 담는다. 


 우연히 그의 <라스트 레터>란 영화를 보게 되었다. 대세 배우 히로세 스즈의 어린 모습이 담겼고 마츠 다카고는 중년임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와이 슌지에 의해 담긴 마츠 다카코는 <4월 이야기>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까마귀 복장을 했음에도 매일 같이 꿈에 나왔던 챠라의 모습과 <스왈로테일 버터플라이>에서의 '아게하'의 모습은 비참함에도 더 없이 아름다웠었다. 영화속에 그들은 젊었기에 투쟁했고 고민했으며 옭아매는 모든 것들을 벗어나려 애썼다. 이와이 슌지는 세계를 구축하였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여주었다.


 기억은 미화되고 미화된 기억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포장된다. 내가 사랑했던 이와이 슌지가 변한건지 당시 나의 기억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미화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라스트 레터>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심지어 디지털로 촬영한 그의 카메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2.

 "재즈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1976년 그래미에서 멜 토메는 엘라 피츠제럴드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엘라 피츠제럴드는 멋드러진 스캣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재즈의 황무지에서 놀랍게도 이 질문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은 사라진 채 '대답'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희화화된 채로.


 내가 좋아한다고 관심도 없어하는 남을 단죄하는 것은 '독재자'의 '그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하기에 남들이 생각하는 대답은 차차해 놓고 과연 나는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해보았다.


 고민에 앞서 스윙이 뭔지 카운터 포인터가 뭔지 어디까지 콘트라 팩트인지 쥐뿔도 모르면서 뭐라 이야기하는게 맞나싶은 생각이든다. 뮤지션 몇명 안다고 으스댔던 내 모습이 이렇게 병신같을 수 없다.


 내가 병신같고 위선적임을 이 정도 말했으면 알것이고, 그럼에도 누군가 나에게 멜 토메와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새벽 3시 시청(내 관념 속에 시청은 서울시청이 유일하다)앞 어느 곳이라고 이야기 할 것 같다.


 말은 쉽지만 이런 감정을 오롯이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심지어 그 시간에 그 곳에 가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내 감정을 조금 이야기 하자면 그 시간 그곳은 멀티버스 속 어딘가처럼 내가 서있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태양의 활기가 사라진, 쓸쓸하고 측은한 공기만 남아있는 듯한,,, 그것이 재즈인지 뭔진 모르겠으나, 여튼 나에게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게 대답할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3dWy50rFgvg&t=2s

 


3.

 엄마는 나에게 늘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엄마에게 늘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린 늘 서로에게 미안해 한다.


 생각해보니 몇년 전 헤어진 그녀도 갑자기 나한테 미안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그녀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 이유가 나에게 미안하단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와 헤어졌고, 그녀를 잊고 살았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고 그 새로운 누군가와도 헤어지고 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며 꽤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불현듯 그녀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한 일이 떠올랐다. 엄마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 한 것과 그녀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한 것이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나는 엄마에게 미안하다. 충분히 엄마는 여성으로서 이 거지같은 세상에서 나를 키워냈고, 나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그랬기에 나의 실패는 온전히 나에게서 기인한 문제였고 그랬기에 나는 그녀에게 보은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미안하다.


 그녀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지 못했으며, 나의 자존심은 그녀의 의중보다 앞섰다. 그러나 그녀는 늘 나에게 최선을 다했고 늘 자신의 욕심보다 나를 배려했다.


그럼에도 엄마도 그녀도 나에게 미안해 했던 이유는 스스로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엄마는 본인의 존재가 사라질때까지 내 옆에 있겠지만, 그녀는 이제 내 옆에 없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그녀를 그리워한다거나 미련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미안했지만 미안하진 않다.


 엄마에 대한 미안함이 사라진다거나 앞으로 마주할 누군가에게 미안함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라고 이야기한다면 잘모르겠다. 그냥 개새끼로 사는 것이 낫겟단 생각이 들지만, 그것도 딱히 능사는 아니기에 최대한 표현을 하며 살아야겠단 아주 바람직한 생각을 해본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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