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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창조하는 인격 만들기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나요?

by 쥬디

“그대를 모욕하는 것은 그대를 지저분하게 헐뜯는 자나 주먹을 휘두르는 자가 아니라 그자들에게 모욕당했다고 여기는 그대의 생각임을 깨달아라. 누군가가 그대를 화나게 만든다고 느낄 때, 그대의 마음속 생각이 그대를 노엽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즉 무엇보다 심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하라. 잠시라도 좋으니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과 여유를 먼저 가진다면, 그대 자신을 이기는 것은 쉬운 일이 될 테니.”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 제20장’


우리는 가끔 ‘저 사람이 한 말에 상처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 사람은 상처를 준지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저 사람은 상처를 준 적이 없다. 즉 상처는 받은 쪽에서 ‘아! 상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상처가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엥케이리디온에서 명언을 날렸다. ‘그대를 화나게 만든다고 느낄 때 그대의 마음속 생각이 그대를 노엽게 만든다’. 즉 화나고 상처라고 느끼는 주체는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내가 주체라는 거다. 요즘 새로운 지역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곳에 가니 두 분이 서로 상처받았다며 속상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내가 판사도 아니고 누가 더 많이 상처를 준 걸까 셜록홈스처럼 파헤칠 수는 없지만 먼저 드는 생각은 상대방의 말과 행동으로 내가 상처의 크기를 정하고 만든 건 아닐까 싶다. 내 일이 아니라서 이렇게 태평하게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지만 인문학을 삶에 계속 적용해 보면 답이 나온다.


남편이 회사 스트레스 때문인지 한번 크게 아팠기 때문인지 얼마 전부터 사소한 일에도 금방 삐지고 화를 내고 있어 난감하다. 같이 화를 내봤자 분위기만 썰렁해지니 그럴 수도 없어 첫 번째는 자리를 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매번 그럴 수도 없고 에픽테토스가 말한 ‘내가 관할할 수 있는 영역에만 관심을 가지며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너무 마음을 쓰지 말라’라고 한 대로 실천해 보기로 했다. 물론 잘되지는 않는다. 화난 표정 보고 있으면 한마디 해주고 싶다. 그런데 가족이라도 내가 아니기에 덤덤하게 반응하려 한다.-이게 보통 힘든 게 아니다-그랬더니 조금은 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아들이 학교를 가야 는데 거실에 시계를 보다가 버스를 놓쳤다고 화를 낸다. 얼마 전부터 5분 느리게 간다는 거 알고 있었는데 건전지를 교체하는 걸 깜빡했다. 내 탓을 하는 푸념 소리가 듣기 싫다. 한마디 하려다가 얼른 ‘그럴 수 있지. 모든 걸 내 탓으로 할 필요는 없어. 네가 화나는 거까지 내 영역의 일은 아니잖아’라고 생각하니 괜히 미안하거나 같이 화내고 싶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요즘 유시민 작가의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를 밀리의 서재에서 오디오로 재밌게 듣고 있다. 평생 인간과 사회를 연구하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그 분야에 해박한 저자가 과학과 수학과는 거리를 두었다고 하며, 그 분야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게 되면서 인간이 아무리 영적인 존재이지만 엄연히 육체라는 물리적인 부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뇌에서 일어나는 원리와 역할을 이야기하며 한때 유행한 트로트 가사에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어찌 나를 알겠느냐’라는 말을 인용해 인간의 몸과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과학적으로 확실히 알아야 인간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 공부가 필요하다.


가족이고 친하다고 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어쩌면 오만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도 어찌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지 않은가. 그리고 감정은 하늘의 구름만큼 무수히 변화한다. 감정이 나라고 생각하지만 엄연히 말하면 내가 아니다. 감정도 나의 일부일뿐이다. 감정 위에 내가 있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걸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은 수많은 감정의 폭풍우에 수도 없이 시달려보면서 종교와 인문학의 도움과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겨우 여기까지 온걸 수 있다. 물론 전혀 대단하지 않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또 나의 모습이 어떻게 돌변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아주 조금은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도 단련이 필요하다. 행복은 순간적으로 느끼고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다.


톨스토이가 죽은 뒤 그의 방안에 빼곡하게 쌓였던 실패작이 있었고, 모차르트도 평생 600편을 작곡했지만 10프로 이내만 작품성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위대한 작품을 남긴 인물이 될 수 있던 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매일 습관적으로 노력하고 단련했기 때문이다. 행복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부모한테 사랑받기만 했던 어린 시절이 행복했어, 풋풋한 청춘시절이 행복했어 등 행복을 마치 시절에 두고 한정하는 걸로 우리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행복은 나이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행복을 창조하는 인격을 매일 닦고 단련하는 속에 몸과 마음에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받기만 한다고 주기만 한다고 행복하지 않다. 행복도 습관이다. 행복은 늘 존재한다. 타인에게 연연하지 않고 내 감정을 의연하게 바라보고 지휘하는 속에 행복의 봄을 발견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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