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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쥬디 Jun 05. 2024

‘춤키’와 ‘다라’의 추억

글로벌 친구

'춤키'는 내 또래 인도 여성이고 '다라'는 나보다 한참 나이가 적은 미국 여성이다. 몇 년 전 이 두 사람과 나누었던 우정이 생각난다. 2016년 봄이었다. 나와 같은 종교를 가진 인도 가족이 송도국제도시에 이사 왔다며 내가 챙겨줬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엉성한 영어 실력이지만 왠지 재밌을 거 같아 수락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청년을 데리고 그 집을 방문했다. 문을 여니 까무잡잡하고 눈코입이 선명하고 머리카락이 긴 아름다운 여성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름은 ‘춤키’라고 했다. 남편과 어린 딸 그리고 인도 고유복장인 사리를 입고 있는 춤키의 어머니가 있었다. 영어를 잘하는 청년이 있어 우린 금방 많은 대화를 하고 친해질 수 있었다. 인도식 영어라 발음이 조금 특이했다. 춤키의 남편은 송도의 GCF(녹색기후기금)에 발령을 받아 왔고 첫 해외가 한국일 줄은 몰랐다며 좋아했다. 인도에서는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냐 하니 케이팝과 케이드라마로 로망의 나라라고 했다. 나는 이 좁은 나라를 떠나고 싶었는데. 인도는 나라가 커서 인종과 민족이 100여 개가 넘고 인도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려면 영어를 포함해 5개 언어 정도는 해야 한다고 했다. 아직도 신분제도인 카스트제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첫 만남 이후 카톡으로 구글 번역기를 돌리며 서로 어설픈 대화를 하다가 어느 날 춤키가 향수병을 앓고 있다고 해서 영어가 안 통해도 한번 가볼까 싶어 지인과 함께 다시 방문했다. 춤키가 문을 열자 내가

  "서프라이즈!"

라고 외치며-지금 생각하니 어디서 그런 용기가! -들어갔다. 춤키는 나에게 맞춰주려는 듯 큰 눈을 더 크게 뜨고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문제는 대화가 원활히 되지 않았다. 영어 하는 청년이 빠진 만남은 그야말로 구글 번역기 하느라 핸드폰만 엄청 쳐다보며 두드리고 멋쩍어 웃기만 하는 아주 답답한 모드로 흘러갔다. 내가 좀 무모했구나 싶었다. 날씨가 좋다고 말했지만 미세먼지가 극심한 날이라 이것도 이상한 말이 되었다. 진땀이 났다. 춤키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일어나더니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밥을 먹고 가라 했다. 주방에서 왔다 갔다 하니 그런 거라고 확실히 알았다. 크고 깨끗한 식탁으로 인도식 카레와 닭다리요리 야채 조금을 한 사람당 하나씩 큰 접시에 담아 왔다. 우리에게는 포크와 수저를 주고 자신은 손을 깨끗이 씻더니 손으로 먹기 시작했다. 인도 사람은 손으로 먹는다는 말로만 듣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나와 지인은 우리도 손으로 먹어야 되는 거 아냐? 하다가 어색해 수저로 먹기 시작했다. 카레는 정말 맛있었고 향이 강했다. 닭다리는 좀 짰지만 먹을만했다. 춤키는 접시에 있는 음식을 깨끗이 먹고는 손으로 먹으면 설거지할 때 더 좋다며 빙긋 웃었다.      


나와 춤키는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만나 일상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았다. 몇 달 후 춤키 주변에 '다라'라는 미국 여성이 이사 왔다며 같이 만나러 가자 했다. 겁도 없이 또 따라나섰다. 다라는 송도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왔다고 했다. 키가 크고 날씬한 흑인 여성이었는데 임신을 하고 있었다. 아빠는 어디 있냐 하니 자기 혼자 키울 예정이라 했다. 사귀다 헤어졌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가끔 만난다고 했다. 미국문화라 역시 다르구나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건 춤키가 내가 영어를 잘 못 알아들으니 둘이 영어로 대화하고 나에게 다시 천천히 제스처를 섞어 가며 설명하는 것이었다. 너무 웃겨서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했다. 말이 얼른 나오진 않아도 그들의 대화는 대강 알아들었다. 어느 날 춤키의 집에서 우리가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나도 모르게 우리말로 말하고 그렇죠?라고 말하니 그냥 웃길래, 옆에 있던 사람이 ‘한국말이잖아요. 춤키 못 알아들어요’라고 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아! 이 어중간한 영어여.      


얼마 후 그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좌담회를 연 것이다. 나는 약간의 음식을 준비하고 큰 애에게 피아노 연주를 부탁했다. 곡목은 아델의 ‘썸원라이크유’였다.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는 거실 한쪽에서 다라가 눈을 감고 흥얼흥얼거리는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미국을 그리워하고 있나 보다 생각했다. 얼마 후 다라는 자신과 똑같은 딸을 낳았다. 산부인과로 보러 갔는데 세상에, 그렇게 키가 큰 아기는 처음 봤다. 다라는 우리가 온 것을 정말 고마워했다. 따듯한 우정을 나누다가 다라는 얼마 후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는데 어느 날 장문의 문자가 왔다. 새로 정착한 곳에 아직 친구가 없어 우리가 매우 보고 싶다는 거였다. 춤키는 한번 가보겠다고 했다.      

그 이후 얼마 안 있어 나는 다른 지부로 발령이 나서 더 이상 춤키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다. 어느 날 춤키에게 문자가 왔는데 인도에 계시는 엄마가 코로나에 걸려 위독하다고 했다. 함께 걱정하며 진심으로 낫게 기원했다. 다행히 회복되었다. 그리고 코로나가 막바지를 달릴 때 춤키는 인도로 돌아가게 됐다고 해서 작별 인사하러 송도로 찾아갔다. 춤키는 여러 선물을 주며 나에게 베스트 프랜드라며 인도에 오면 꼭 연락하라 했다. 나도 그러겠다고 하며 영어를 완벽히 해서 가겠다 말했는데, 아직도 버벅거리고 있다.      


어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며 여행 도중 말이 안 통해도 글이나 제스처로 소통하려고 애쓴 연암의 모습이 재밌어 갑자기 춤키와 다라가 생각났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만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때그때 만난 인연은 참으로 소중하고 인생에서 빛나는 순간으로 남아있다.


#인도 #미국 #소중한친구 #춤키 #다라 #아델 #썸원라이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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