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숨 고를 만한, 그저 가만히 있을 만한, 그런 장소가 필요해.
나만의 비밀장소를 설명하자면 일단 하나의 하천을 머릿속에 떠올려야 한다. 그 하천을 따라 산책로가 꽤 잘 되어 있었는데 숲이 우거져 있는 느낌이 날 정도로 높이 뻗은 나무들이 하천을 따라 늘어서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날이 추울 때나,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더울 때나, 언제나 나는 마다하지 않고 그 곳에서 운동을 하곤했다. 어릴 적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다운받아 가지고 다니던 MP3를 들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나는 한시간 가량 뛰거나 걷는 것을 매우 좋아해고, 매일 매일 하루가 멀다하고 운동을 하러 나가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게 열심히 규칙적으로 살 수 있었나 싶기도 하다.
그 하천을 따라 조깅을 하다보면 내가 반환점으로 지정한 곳이 나온다. 그 산책로에서 조금은 높이가 있는 계단을 올라 빠져나오면 하천의 맞은편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는 아주 신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오래된 전통이 있거나 낡은 다리도 아니었다. 단지 난간들 하나하나에 여기저기 다른 색으로 입혀진 낙서들이 즐비했는데 누군가는 사랑의 고백을, 누군가는 욕설을, 누군가는 그저 본인들에게 의미있는 그래피티를 남겨놓는 정도의 소소한 표시들이었다. 다리의 난간에는 자물쇠들도 꽤 많이 걸려있었는데 이런 자물쇠를 걸어놓는 이벤트는 어딜가나, 어떤 다리에서나 이제는 시시콜콜하게 많이 보여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사실 나도 한 번 해봤으나 자물쇠를 제아무리 걸어도 이루어지지 않을 사람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은 자물쇠 이벤트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그 다리 중간 쯤에 구명튜브가 하나 걸려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일년 365일 내내 색깔이 언제나 바래지 않고 주황색으로 반짝였다.
하천을 따라 내리 달려오던 나는 줄곧 그 다리 위에서 숨을 골랐다. 정확히는 주황색의 튜브가 있는 그 지점 옆에서 난간에 기대어 하천을 내려다보면 하천위로 날아드는 새들이나, 반짝이는 물결이나, 하늘에 줄지어 흘러가는 구름때들이나, 하천을 따라 늘어선 큰 나무들의 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들이 살랑거리는 것을 넋놓고 지켜볼 수 있었다. 숨이 가쁘다가도, 얼굴이 흐르는 땀에 다 젖었다가도 그렇게 잠시 가만히 서 있으면 마음의 쿵쾅거림도, 복잡했던 머리도, 조금씩 조금씩 바람결에 고요해졌다. 그렇게 땀이 말라갈 때 쯔음으로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나는 그 다리 위에서 나의 고민과, 걱정과, 눈물과, 아픔과, 기쁨과, 힘듦과, 행복을 십년도 넘는 시간동안 떠나보냈다. 봄이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감촉이, 여름이면 무성하게 푸르렀던 울창함이, 가을이면 선선해진 주홍빛이, 그리고 겨울이면 얼얼할 정도의 시원함이 내가 무사히 곱씹어 보내주어야 했던 나의 순간들과 언제나 함께해주었다. 참, 그 다리 위에서 많이도 울었고, 많이도 혼자 속삭였고, 많이도 다시 다짐했었는데…
지금 나에게는 더 이상 그런 장소가 없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혼자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아마 그래서도 더 휘청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립다. 나의 그 공간, 나만의 비밀 장소. 그리고 또 그립다. 내가 고이 접어 떠나 보내주었던, 아쉽지만 놓아주었던 그 다리 위 나의 속삭임들이. 그러나 하천의 물결을 따라, 바람결을 따라 그렇게 내려놓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 내게 있었음에 한편으로는 참 감사하다. 다시 그 장소로 갈 수 있다면 나는 또 어떤 이야기를 속삭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