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결정 VS 보호원칙

가능한 한 개인의 자율성을 유지하되, 필요 시 국가가 개입한다

by Heidi


스위스에서는 KESB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법정 후견인의 권한이 크다 보니, 불완전한 가정에서 아이가 위탁 시설로 보내지거나, 치매를 앓는 노인의 재산이 부당하게 사용되었다는 사례들이 언론과 입소문을 통해 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개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제도일수록, 작은 문제도 크게 느껴지고 오래 기억된다. 그리고 때로는 충분한 정보 없이 전달되면서, 실제보다 더 과장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퍼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정적 인식만으로 이 제도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KESB는 본래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다. 많은 경우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개인과 가정을 지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다만 그 과정이 일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나타날 때, 사람들의 기억에는 ‘개입’의 측면만이 더 강하게 남게 된다.

올해 2월, 시아버님께서 갑작스럽게 편찮으셔서 응급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여러 병원을 옮겨 다녔지만 끝내 뚜렷한 병명도, 원인도 찾지 못한 채 많은 약만 처방받고 돌아오셨다. 평소 시댁은 늘 웃음이 많고 농담이 오가는 집이지만, 그 시기만큼은 달랐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모두가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우리 시부모님은 연세에 비해 놀라울 만큼 활동적이시다.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먼 거리를 다니시고, 직접 운전을 하며 두 분만의 여행도 즐기신다. 특별한 경우라기보다, 내가 스위스에서 흔히 보아온 노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더욱, ‘아프다’는 사실이 쉽게 와닿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나에게 언제 시간이 있는지 물었다. 아버님이 준비해 둔 서류가 있는데 가서 서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댁이 가까운 거리임에도 굳이 나를 함께 데려가려는 남편의 태도가 낯설었고, 어떤 서류이기에 서명까지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일요일 저녁, 시댁에 도착하자 아버님은 조용히 서류 한 뭉치를 내어 보이셨다. 그 문서는 Vorsorgeauftrag(사전대리권) 이였다. 언젠가 스스로 판단할 수 없게 되는 날을 대비해, 누가 자신을 대신해 결정할지를 미리 정해 두는 문서였다. 세 명까지 대리인을 지정할 수 있고, 한 사람이 역할을 할 수 없을 경우 다음 사람이 이어받는다. 자필로 작성해야하고 공증을 받아야 하는, 생각보다 엄격한 형식을 갖춘 문서였다. 그 순간, 솔직히 조금 낯설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자식이 맡는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어머님은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요즘 스위스에서는 Vorsorgeauftrag(사전대리권)과 함께 Patientenverfügung(사전의료결정권)을 준비하는 것이 거의 기본이라고. Patientenverfügung(사전의료결정권)은 생명 연장 치료를 받을지, 심폐소생술을 할지 말지, 어떤 치료를 거부할 것인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를 담는 문서다. ‘누가 결정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스위스의 제도는 단순히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아버님이 조용히 내밀었던 그 서류 한 장처럼.


물론 모든 사람이 이렇게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준비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국가가 개입한다. 그 역할을 하는 기관이 바로 KESB(아동성인 보호청)이며, 이를 통해 Beistandschaft(법정후견인)이라는 제도가 작동한다.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필요성을 판단하고, 누가 대신 결정을 내릴지를 정한다. 스위스에서는 에 대해KESB(아동성인 보호청)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법정 후견인의 권한이 크다 보니, 불완전한 가정에서 아이가 위탁 시설로 보내지거나, 치매를 앓는 노인의 재산이 부당하게 사용되었다는 사례들이 언론과 입소문을 통해 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개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제도일수록, 작은 문제도 크게 느껴지고 오래 기억된다. 그리고 때로는 충분한 정보 없이 전달되면서, 실제보다 더 과장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퍼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정적 인식만으로 이 제도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KESB(아동성인 보호청)는 본래 개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다. 많은 경우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개인과 가정을 지탱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다만 그 과정이 일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나타날 때, 사람들의 기억에는 ‘개입’의 측면만이 더 강하게 남게 된다. 학교에서도 가끔 Beistandschaft(법정후견인)이 적용된 가정을 만난다. 그때마다 후견인은 단순한 행정적 존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함께 떠받치는 또 하나의 축처럼 보인다. 상담 자리에도 반드시 함께하고,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연락을 받는 사람.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점점 이해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누군가를 대신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오늘 한국 뉴스를 보니, ‘치매 머니’라는 말과 함께 적지 않은 재산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후견인 제도를 확대하려는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문득 이 제도가 스위스의 Beistandschaft(법정후견인)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스위스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국가가 개입하기 전에, 먼저 개인에게 선택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 그 선택은 단지 법적인 준비가 아니라, 어쩌면 스스로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다짐처럼 느껴졌다.


Vorsorgeauftrag(사전대리권) Beistandschaft(법정후견인), 결국 차이는 분명했다. 미리 스스로 준비할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누군가가 대신 결정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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