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를 스위스에서 보낼 것인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최근 한국 지인들과 함께정년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주제는 단순하지만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노후를 스위스에서 보낼 것인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흥미롭게도 자녀가 있거나 스위스에서 직장생활을 해 온 지인들은 대부분 스위스에 남겠다는 입장이었다.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부모는 자연스럽게 자녀 가까이에 머무르길 원하고, 오랜 사회 생활을 통해 형성된 인간관계 역시 이미 스위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노후의 선택은 ‘어디에서 살 것인가’보다 ‘누구와 가까이 있을 것인가’에 가까워 보였다.
반면 자녀가 없거나, 스위스에서 깊은 사회적 기반을 형성하지 않은 지인들은 조금 다른 선택을 이야기했다.이들은 한 나라를 선택하기보다는 스위스와 한국을 오가며 지내고 싶다고 했다. 두 나라 사이에서의 삶, 그 유연함 자체가 하나의 대안처럼 느껴졌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이들이 이미 ‘삶의 마지막’까지도 현실적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들이 정년퇴직 시기에 접어들면서 이미 유언장을 작성한 경우도 많았고, 어떤 지인은 농담처럼 비행기를 탈 때마다 유언장을 쓴다고 했다. 웃으며 나눈 이야기였지만 그 안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인식이 담겨 있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상속 문제로 이어졌다. 스위스인인 내 남편은 스위스에서는 상속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유리하게 재산을 몰아주는 것은 어렵다고 설명했다. 즉, 법적으로 일정한 보호 장치가 있어 극단적인 불균형은 방지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상속세는 연방이 아니라 각 주(칸톤)마다 다르게 적용된다. 이 점에 대해 남편은 오히려 더 불합리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세금 부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최근 스위스에서는 부유층 과세를 강화하자는 국민투표도 있었다. 상위 약 10%의 고소득층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자는 내용이었지만 결국 가결되지는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부유층 중 상당수가 단순히 ‘노력으로만’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니라 상속을 통해 부를 이어받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선택을 넘어 사회 구조와 세대 간 불평등 문제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스위스 상속법이 정확히 어떤 구조인지 한 번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스위스 상속법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스위스 민법 (Zivilgesetztbuch) 에 규정되어 있다. 2023년 1월 1일 개정된 상속법에는 상속인에게 반드시 남겨줘야 하는 최소 금액인 강제 상속 지분(Pflichtteil)이 줄어들어, 유언자가 자신의 재산을 더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강제 상속 지분이란 법적으로 보호받는 상속인 (직계비속, 배우자)이 반드시 받아야 하는 최소한의 지분이며, 상속인이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한 박탈할 수 없다. 또한 유언으로도 이 최소비율은 침해할 수 없다. 개정법에서는 자녀는 법정 상속분의 1/2, 배우자는 법정상속분의 1/2를 보장 받으며 부모는 더 이상 강제상속분이 없다. 이 변화는 단순한 숫자 조정이 아니라 상속의 철학 자체가 바뀐 것이다.
강제상속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유롭게 처분가능하다(유언의 자유, Testierfreiheit). 개정법에서는 강제 상속 지분이 줄어들면서 유언자가 마음대로 배분할 수 있는 자유 지분(freie Quote)이 늘어났다. 이를 통해 동거인(사실혼), 친구, 자선 단체 등에 더 많은 재산을 남길 수 있다. 상속이 단순한 가족중심에서 개인의 의지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유언은 대표적으로 자필 유언 (손으로 작성 + 날짜 + 서명)과 공증 유언 (공증인 + 증인)으로 나뉜다. 또한 유언보다 더 강력한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상속계약 (Erbvertrag)이 있다. 이는 상속자와 제 3자가 미리 합의하는 것인데 쌍방 또는 다자간 합의가 필요하고 일방적으로 변경이 불가하다. 예를 들어 자녀가 상속 대신 생전 지원이나 증여를 받기 원할 경우, 또는 특정 재산 분배를 미리 확정하는 경우 이러한 계약서를 쓰기도 한다. 자녀 또한 상속 포기를 할 수 있는데, 이는 부채 상속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상속은 권리이면서 동시에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가족 상황 총 강제상속지분 (합계) 자유 지분
기혼 & 자녀 있음 50% (배우자 25% / 자녀 25%) 50%
미혼 & 자녀 있음 50% 50%
기혼 & 자녀 없음 37.5% 62.5%
독신 & 자녀 없음 0% 100%
스위스 상속법을 정리해보면서 느낀 점은 단순히 “누가 얼마를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보호와 개인의 자유 그리고 사회적 공정성 이 세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언장이나 상속 계약이 없는 경우, 기존의 법정 상속 순위(Parentelsystem)가 적용된다. 이 제도는 혈연 관계를 기준으로 상속 순위를 정하는 구조이다. 스위스 상속법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배우자는 항상 상속권을 가진다는 점이다. 다만, 누구와 함께 상속하느냐에 따라 배우자의 몫은 달라진다.
제1순위: 자녀가 있으면 모든 재산은 자녀 (자녀전체 1/2)와 배우자 (1/2)에게 분배
제2순위: 자녀가 없을 경우에는 배우자(3/4), 부모 (1/4)에게 분배
제3순위: 1,2 순위가 없을 경우 조부모 및 그 후손 (삼촌/고모, 사촌)
이 규정은 단순한 법 조항이 아니라 유언이 없을 때 국가가 대신 정해주는 기본 설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유언을 작성하지 않으면 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구조대로 자동 적용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최근 스위스 상속법은 유언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언이 없다면 여전히 전통적인 가족 중심 구조가 작동한다.
상속법을 이해할 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오히려 ‘예외’에 있다. 일상에서는 자주 등장하지만, 법적으로는 예상과 다르게 처리되는 경우들이다.
동거 커플 (Konkubinat):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파트너는 법적으로 여전히 상속권이 없다. 반드시 유언장을 작성해야 하며, 이번 개정으로 늘어난 자유 지분을 활용해 더 많은 금액을 남겨줄 수 있다. 즉, 법이 아니라 개인의 준비가 관계를 보호하는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생전 증여 (Schenkung): 상속은 사망 이후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전의 재산 이전과도 깊이 관계가 있다. 생전에 이루어진 증여가 상속 시 어떻게 계산되는지에 대한 규칙이 개정법에서는 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생전에 준 재산도 상속 계산에서 고려될 수 있는데, 이는 상속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한국은 여전히 부모에게도 강제상속지분 1/3이 인정된다. 이는 단순한 법적 규정이라기보다, 부모 역시 보호해야 할 가족 구성원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흔히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표현이 떠오르듯, 세대 간 책임과 가족 중심 가치가 법 제도에도 일정 부분 남아 있는 셈이다.
또한 한국은 스위스에 비해 개인이 자유롭게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범위, 즉 자유 지분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반면 스위스는 최근 상속법 개정을 통해 강제 상속 지분을 축소하고 유언자의 선택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를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한국은 가족 보호 중심의 상속 구조이고, 스위스는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상속 구조인 것 같다. 물론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두 제도는 각 사회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