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방에 들러 몰래 미순의 외상값을 갚고 머리 손질에 한참을 공들인 뒤, 광이 날 때까지 구두를 닦아 신고 미순에게 달려가던 순애보의 정근은 이제 없었다.
정근은 오로지 엄마밖에 모르고 누나와 동생들 말이라면 벌벌 떨었다.
미순은 정근과 백년해로를 약속한 아내였지만 정근에게 미순은 남보다 못했다.
남들의 눈에는 가족을 위해서 밤낮으로 열심히 일만 하는 성실한 정근이었지만 남편으로서의 정근은 미순을 늘 방치하고 학대하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미순은 정근의 발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오그라 들었고 그가 언제 화를 낼지 몰라 항상 눈치를 보았다.
정근과 그의 가족들 틈에서 미순은 외딴섬에 홀로 있는 기분이 들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미순은 늘 혼자 부엌일에 여념이 없었다.
정은의 모습은 친정 엄마 미순을 닮아 있었다.
성실하다, 인상이 선하다는 평가를 한 몸에 받던 성호 역시 남편으로서는 정은을 늘 외롭게 했다.
성호는 정은의 등 뒤에 숨어 있다가 일이 생기면 정은을 시댁이라는 전쟁터에 밀어 넣고 도망쳤다.
정은도 친정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가슴 깊은 곳에 날 선 칼 하나를 숨긴 채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이혼할 거야!"
도망치고 싶었던 정은을 붙잡아둔 건, 두 아이 예빈과 우빈이었다.
정은은 엄마 없는 설움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필요할 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른이 되어 주고 싶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도 그런 어른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정은은 그 생각을 끝내 지워내지 못했다.
엄마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렸지만, 막상 엄마를 대하는 정은의 태도는 차가웠다.
자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 새끼만큼은 죽기 살기로 지켜 내겠다'며 이렇게 발버둥 치고 있는데, 엄마는 어린 정은과 정민의 손을 너무 쉽게 놓아 버린 것 같아 야속했다.
아빠 정근과 살 때는 늘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해 보이던 엄마 미순은 재혼을 하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재혼한 남편과 집도 장만했다. 구축이라 외관은 낡았지만 리모델링을 해놓으니 실내는 잡지 속 사진처럼 그럴듯했다. 베란다에는 화초를 가득 들였고 매일 물을 주며 잎을 한 장 한 장 닦았다. 어항도 세 개나 놓았다. 때가 되면 어항 속으로 물고기 밥을 넣어주고 물때가 끼지 않게 물을 갈고 윤이 나게 닦아줬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은은 속으로 '새끼들이나 그렇게 좀 키우지!'라는 생각을 했다.
정은은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어린 모습의 미순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작고 작은 아이가 감당했을 슬픔과 고단함이 안쓰러워 정은은 마음속으로 어린 미순을 꼭 안아주었다. 이렇게 하면 엄마에 대한 미움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정근의 마음을 식게 만든 건, 미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순의 친정은 가난했다.
엄마의 수술비를 몰래 훔쳐 달아난 큰오빠 수철은 그나마 그 돈으로 자리를 잡아 번듯하게 잘 살고 있지만 다른 형제들은 늘 궁핍했다.
막내인 미순 역시 냉대하는 남편과 살면서도, 정근의 성실함 덕분에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안 하고 살 정도는 되었다.
미순은 정근 몰래 빚을 내서 친정 식구들을 돕기 시작했다.
친정이 잘 살아야 더는 시댁에서 자신을 무시하고 미워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미순의 노력에도 친정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친정으로 들어가는 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다름없었고 미순도 한계에 부딪혔다.
미순이 식당일을 하며 빌린 돈을 갚아나갔지만 고금리로 돈을 융통한 탓에 원금은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돈을 받지 못한 빚쟁이들이 집으로 쳐들어오고 정근이 알게 되었다.
미순의 사정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길 정근이 아니었다.
정근에게 맞는 것도 모자라 정근의 누나 손에 머리채를 잡힌 채로 온 동네를 끌려 다녔다.
남편 성호 역시 변변치 않은 친정을 둔 정은이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장모로 인해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모든 돈을 전부 잃고 돌쟁이 딸아이와 길바닥에 나 앉아 오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장모와 정은을 원망할 법도 한데 성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성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사람..
말을 아끼고 속으로 삼키는 사람..
너무 묵직해서 정은은 답답했다.
자신을 비난해도 좋으니 성호의 울타리 안에 정은이 있음을 한 번만이라도 느끼게 해 주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