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말 안녕..

by roun

정은은 아빠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이룬 자신의 가정이, 아빠가 생각한 것만큼 불안하고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정은이 아빠 곁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은의 아빠는 암선고를 받고 2년의 투병 끝에 결국 하늘로 떠났다.

정은 아빠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정은의 시아버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돈 장례식에 자신이 왜 가야 하냐며 오지 않았다. 장례를 마친 뒤에도 며느리 정은에게 위로 담긴 말 한마디 건넬 줄을 몰랐다.

성호도 자신의 아버지가 장례식장에 오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빠를 떠나보낸 정은은 하늘 아래, 이제 정말 자신과 남동생 정민 단 둘만 남은 것 같아 처량하고 서글펐다.

장남이 없으니 늘 기고만장했던 정은의 할머니는 오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다.

변덕이 죽을 끓는 어머니를 받아주는 자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혼한 정근이 재혼을 하며 손주들만 남겨지자, 손주들을 돌봐주겠노라 얼른 자리를 꿰차고 들어와 앉았다.


자식들도 학을 떼는 어머니의 변덕을 손녀인 정은이 받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아빠에게 할머니랑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여러 번 호소하였지만 아빠는 참으라는 말뿐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정은이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나서야 아빠는 서둘러 형제들과 의논했다.


"어머니를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기간을 정해서 한 집씩 돌아가며 모셨으면 좋겠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정근의 말에 누나들과 동생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다.


"정은이 걔 하나만 참으면 여러 집이 편할 것을, 이왕 여태 참고 산거 조금만 더 참고 살라고 해. 걔는 그것도 못한대?"


정근 또한 괜한 말을 꺼내 형제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 건 아닌지 마음이 불편했다.

딸 정은의 어깨를 토닥이며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부탁했다.


손녀 정은도 버텨낸 그 길고 긴 시간을 자식들은 단 하루도 모시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둘러 어머니를 모실 요양원을 찾기 시작했다.

정근이 죽고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는 기간까지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남편, 자식 앞 세우면 그들의 명까지 다 산다더니.. 질겨도 너무 질긴 이놈에 명줄이 지긋지긋하기만 하다.

처지가 이리되고 나서야 자신이 구박하던 맏며느리 정은 어미가 그립다.

정은 어미가 엄마라고 부르며 살갑게 다가왔을 때, 매몰차게 내치지 말고 따듯하게 품어줄 것을..

말로만 엄마라고 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엄마로 모셔준 유일한 며느리가 정은 어미였음을..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산 사람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마음은 지옥인데 때 되면 밥 먹고 잠자고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며 웃기까지 하니 정은은 자신의 모습이 혐오스럽다.

엄마라고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자식이 둘인데 정은은 아이들을 위해서 더 열심히 살았다.

정은은 자신은 이미 틀린 인생이라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훗날 자신이 죽고 없을 때, 남을 내 새끼들 비빌 언덕은 만들어 놓고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정은은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썼다.

하루 2시간 이상 자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잠이 고팠지만 정은은 그때마다 돌쟁이 딸아이와 길바닥에 나 앉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버티고 또 버텼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덧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사망한 정은의 엄마가 무연고자가 되어 가족을 찾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정은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한없이 밉지만 한없이 그리워, 단 하루도 마음속에서 지워본 적이 없는 엄마였다.

이대로 나타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어딘가에서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하고 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도 많았는데 가슴속에 삼켜야 할 돌덩이가 또 하나 늘었다.


아빠는 투병 기간이 길어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라도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엄마의 사망 소식은 정은을 매일 무너지게 했다.

마음은 다 녹아내리고 없는데 겉으로는 너무 멀쩡해 보여서 불과 며칠 전, 엄마를 떠나보낸 사람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정은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불쌍한 시선들이 싫었다.

'일찍이 엄마, 아빠도 없이 제 손으로 밥 지어먹어가며 동생 하나 의지하고 살더니 결국은 부모 둘 다 보내고 정말 남매 단 둘이 남았네'하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정은은 숨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은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다들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럴 때일수록 집에 있지 말고 나가 일에 더 매달리라고 했다. 그들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정말 일에 매달리는 시간만큼은 엄마가 기억나지 않았다.


정은은 이제는 정말이지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은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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