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정민이 떠나고 한 달 만에 추석이 다가왔다.
시댁은 친정 엄마를 떠나보낸 지 꼭 일 년 만에, 유일한 가족이자 하나뿐인 동생마저 잃은 며느리 정은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정은에게 이번 추석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네 마음이나 잘 추스르라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정은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의 집 조상님 차례상을 차리느라, 정작 자신의 부모와 동생을 챙길 수 없는 현실이 진저리 나게 싫었다.
몸속의 모든 피가 손끝과 발끝으로 빠져나간 듯했다. 껍데기만 남은 몸을 이끌고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유체가 이탈되어 영혼 없는 육신만이 움직일 뿐이었다.
정은은 넋이 나간 채 시댁으로 향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전쟁 같은 추석을 치러냈다. 뒷정리를 마치고 지친 몸을 잠시 뉘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시누이 여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은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 정은과 눈이 마주친 여진은 정은에게 신나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언니~ 안녕!"
그 말투가 지나치게 경쾌해서 정은은 얼마 전,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인사가 맞는 걸까 의아했다. 우울함에 잠식되어 있는 올케 언니가 걱정되어 분위기를 바꿔 보려 일부러 이렇게 밝게 인사를 건넨 것일까? 하지만 그런 이유라고 하더라도 정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민과 여진은 사돈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누나, 동생 하며 친하게 지냈다.
정민의 사망 소식에 적잖이 충격을 받고 함께 슬퍼해줄 거라 생각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너무나도 해맑은 여진의 모습에 정은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어깨를 토닥여주거나 조용히 안아주며 정은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아주 잠시라도 그녀의 슬픔을 함께 해주기는커녕, 조롱처럼 느껴져 씁쓸했다.
여진의 인사에 정은도 짧게 대답했다.
"어.. 왔어.."
그리고 방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순간,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여진이가 인사했는데 너 왜 모른 척 하니?"
정은이 여진의 인사를 무시했다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정은을 다그치듯 나무랐다.
"어머님, 저 인사했어요."
"엄마, 내가 봤어. 언니가 인사했으니까 그만해."
몇 년 전, 추석 날 있었던 다툼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여진은 또 큰 소리가 날까 싶어 서둘러 엄마를 말렸다.
정은은 이들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살아가고 싶지 않아 졌다. 내 마음이 다치는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졌다. 무례하고 이기적인 그들에게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남편 성호에게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나, 앞으로 너희 집에 안 갈 거야. 그동안 나 아픈 줄 모르고 죽을힘을 다해 내 딴엔 한다고 했어. 잘하는 건 더 잘하려고 했고 못하면 배워서라도 하려고 했어. 물론 내가 예쁨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 발악을 한건줄도 모르지. 근데 그렇다한들 좀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면 안 되는 거니? 그렇게 애쓰는 사람한테 상처 주고 소금뿌리고 생채기를 내야만 했냐고! 주위에서 다들 나보고 뭐라는 줄 알아? 조선시대 며느리도 나처럼은 안 했을 거래. 다들 혀를 내두르는 그 짓을 나는 15년을 넘게 했어. 힘든 것도 힘든거지만 이제는 정말이지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 네 동생 여진이, 그 잘난 시누이도 그래. 걔 뭐 돼? 우빈이 출산 앞두고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네 부모님이 예빈이 봐주겠다고 데려가서 일주일만 부탁한다는 게 예빈이 하는 짓이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못 보내겠다고 이렇게 된 김에 우빈이 하나 잘 끼고 키우라고, 예빈이는 자신들이 키워 주겠다고 안 줘서 나도 내 새끼 내 품에서 못 키운 게 한인데, 거기다 대고 네 동생이 자기 엄마 고생시킨다고 허구한 날 눈치 주고 못되게 말했어. 그러더니 지는 아예 친정 옆으로 이사 가서 친정에 애들 맡겨 놓고 가끔 면회 오듯 한 번씩 들리고. 지는지 부모라 괜찮고 그렇게 다 당연하고 나는 그러면 처맞아 죽을 일이라도 되는 거니? 명절에도 그래. 지는지 시댁에 가지도 않으면서 종일 집에서 쳐 자빠져 있다가 다 끝나고 쉴만하면 밥 먹으러 어슬렁어슬렁 기어 와서 사람 긁는 소리만 하고 앉아있고, 그런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게 아니라 집안의 어른들이 잘못한 건 바로 잡으려고 해야 집구석이 똑바로 돌아가지. 맨날 딸년 눈치만 보고 앉아있고 만만한 게 나라고. 나만 잘못했다고 지적질해 대는 꼴이 꼴 같지 않아서 내가 이제 알아서 그 꼴 안 보고 살겠다고. 그러니까 잘난 너네 집, 네가 알아서 다해!"
처음 보는 정은의 단호함에 성호는 당황했지만 이내 그녀의 생각을 존중하듯, 말을 이어갔다.
"자기가 그동안 우리 집에 잘한 거 나 너무 잘 알아. 어느 누구도 자기만큼 할 순 없을 거야. 인정하고 고맙게 생각해. 내가 봐도 우리 집에서 너무 심했어.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제 그만해!"
성호의 말에 정은은 살짝 놀랐다. 평소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 자신의 속을 터지게 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우 정은은 시댁에 가지 않았다.
성호의 입장이 난처해졌지만, 그것은 그의 몫이라 여겼다.
정은은 이 모든 일이 시댁 때문이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성호의 무심함이 정은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것이라고..
자신이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정은은 숨통이 턱턱 막히면서도 그 위에 쌓고 또 쌓았다.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히 다지고 또 다졌다. 무너뜨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 정은은 너무 힘들었고 무너뜨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서도 엄두가 나지 않아 오랜 시간 망설였다. 하지만 무너뜨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정작 그것들을 무너뜨렸을 때, 정은은 이것이 생각했던 것만큼 두렵고 무서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히려 진작 이 공을 무너뜨리지 않았던 것이 후회됐다. 무너진다는 것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무너진다는 것은 반드시 파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깨끗이 치운 자리에는, 이제는 자신을 해치지 않는 돌들로 다시 쌓아 올리면 된다.
더 이상, 자신을 갈아먹지 않기 위해 결심한 이 선택으로 정은은 비로소 자유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