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운명인가? 우연인가?

6장. 금빛실이 이끄는 길

by 나무늘보친구둥이


무대를 내려온 고은은 머리를 식힐겸 바람을 쐬고 싶어 홀로 공원을 걷고 있었다.

따뜻한 햇살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객석의 박수 소리가 아직 귓가에 메아리처럼 남아 있었다.

박수의 메아리가 사라지자, 고은은 깨달았다. 음악의 시험은 끝났지만 또 다른 선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진석의 프로포즈였다.


그는 몇 번이나 답을 요구했지만, 고은은 늘 시간을 달라고 했었다. 신중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협연 준비로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몇 달 동안, 그 문제를 뒤로 미뤄두었던 것이다.


고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눈부셨다.

“나는 음악을 선택했어. 하지만…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지?”


진석과 함께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사진처럼 스쳐 지나갔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웃던 얼굴, 새로운 음식을 권하던 자신만만한 눈빛, 그리고 고은을 바라보며 건넨 진심 어린 고백.


“내 곁에 있어 달라.”

그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고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음악은 그녀의 삶이었지만, 사랑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사랑과 음악… 둘 다 내게는 진실인데, 왜 이렇게 선택이 어려운 걸까.”


그 순간, 무대에서 따라온 금빛 실이 그녀의 발끝에서 다시 빛나며 원목문을 드러냈다.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문이었다. 문은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은은한 빛을 뿜어내며, 마치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처럼 보였다.


“이게… 뭐지?”

고은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문은 점점 더 강하게 빛나더니, 표면이 물처럼 일렁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흐르는 빛의 물결 속에서 한 여인의 형상이 서서히 드러났다.


순백의 로브를 걸친 그녀의 옷자락에는 금빛 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굴은 온화했지만, 눈빛은 깊은 숲처럼 신비로웠다.

녹아내린 문 속에서 흘러나온 금빛 실이 고은을 감싸며, 그녀의 운명을 다른 시간으로 이어주고

있었다.


클로토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새로운 길이 열렸다. 네 인연은 이제 다른 시대에서 이어질 것이다. 과거의 시험이 기다린다.“


문은 점점 더 강하게 빛나더니,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잠깐만…!”

고은은 손을 뻗었지만, 이미 몸은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눈을 뜬 고은은 낯선 풍경 앞에 서 있었다.


햇살이 장터 위로 쏟아지며 흙바닥 위에서는 먼지가 일렁였다.

6월의 공기는 따뜻했고, 초여름 특유의 풀 냄새와 땀 냄새, 갓 구운 떡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상인들의 목소리가 장터를 가득 메웠다.

“무 사시오, 무!”

“갓 구운 떡이요, 따끈따끈한 떡이요!”

“옹기 항아리, 질 좋은 그릇이 여기 있소!”


아이들은 맨발로 뛰어다니며 웃음을 터뜨렸고,

아낙네들은 바구니를 들고 채소와 생선을 흥정했다.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장터 주변을 감싸며,

햇살은 초여름의 생기를 가득 담아 사람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화이트 셔츠, 블랙 정장바지, 구두 차림이었다.

셔츠가 바람에 흔들리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꽂혔다.


“저 여인 차림새가 어찌 저리 이상한가…”

아낙네들이 속삭였고,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고은은 발끝을 모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옷차림… 여기서는 너무 눈에 띄잖아.”


그때, 한 선비가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다 멈춰 섰다.

흰 도포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의 눈빛은 차분하면서도 깊었다.

선비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수건을 꺼냈다.

“얼굴에 먼지가 묻었소.”


그는 살포시 그녀의 뺨을 닦아주었다. 고은은 숨이 멎는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낯선 시대, 낯선 사람…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


그의 미소는, 카페에서 크림 브륄레를 두고 웃던 선우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고은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죠?” 고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장날이라 더욱 붐비는구료. 내가 안내하리다. 따라오시오.”


장터의 소란은 멀리 사라지고, 두 사람만이 남은 듯했다.

고은은 낯선 설렘속에서, 선비의 눈빛이 왜 이렇게 익숙한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선비는 고은을 데리고 장터를 걸었다.

“저기 보이는 건 옹기장수입니다. 항아리와 그릇을 팔지요.”

“저쪽은 종이장수, 글을 좋아하는 이들이 늘 찾습니다.”

“그리고 저기 골목을 들어가면 세책방이 있소.”


고은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활기차네요. 사람들의 목소리, 냄새, 소리까지 다 생생해요.”


선비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차림새도 낯설고, 말투도 어색하고… 어디서 오셨소?”


고은은 순간 고민했다. 미래에서 왔다고 하면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할 게 뻔하고…..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저는… 그냥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길을 잃었어요.”


선비는 더 묻지 않고, 대신 장터의 풍경을 설명하며 그녀의 불안을 덜어주려 했다.


그 순간, 라케시스의 금빛 실이 공기 속에서 은밀히 흔들렸다.

“인연은 작은 손길에서 시작된다. 실은 이미 서로를 향해 역이고 있구나”


고은은 선비의 따뜻한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고, 선비 역시 그녀의 낯선 존재에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고은은 선비와 함께 장터를 걸으며 활기찬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어린 소녀가 고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호기심과 묘한 질투가 섞여 있었다.


선비가 먼저 소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인사했다.

“아가씨, 장터 구경 나왔구나. 오늘은 날이 좋아서 사람들이 많지?”


소녀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고은을 향해 속삭였다.

“저 여인은 왜 저리 눈에 띄나요? 모두가 저만 보지 않고 그녀만 보네요.”


선비는 웃으며 대답했다.

“낯선 차림새라서 그렇지. 신기해서 다들 보는 거야.”


그러나 소녀는 고은을 향해 다시 눈을 흘기며 말했다.

“예쁘다고 다 좋은 건 아니에요. 너무 눈에 띄면… 사람들 마음을 빼앗기잖아요.”


고은은 순간적으로 소녀의 눈빛에서 현대의 선하를 떠올렸다. 오디션 무대에서 차갑게 빛나던 그 눈빛, 질투와 승부욕이 뒤섞인 표정이 겹쳐졌다.




장터에서 고은을 바라보던 어린 소녀. 그녀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묘한 질투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 뒤에는 깊은 상처가 숨어 있었다.


소녀의 집은 장터에서 멀지 않은 초라한 초가였다.

어머니는 늘 밭일에 매달려 있었고, 아이에게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엄마, 배고파요…”

소녀가 조심스럽게 말하면, 어머니는 호미를 내려놓지도 않고 대꾸했다.

“성가시게 굴지 마라. 밭일이 더 급하다. 밖에 나가서 놀다 와라.”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마루에 앉았다.

놀아달라고 해도, 어머니는 늘 바쁘다며 등을 돌렸다.

“나는 바쁘다. 네가 알아서 놀아라.”


그렇게 방치된 날들이 이어지며, 소녀의 마음에는 작은 상처들이 쌓여갔다.

배고픔, 외로움, 무관심 속에서 자란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갈망했고, 누군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장터에서 고은을 본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고은에게만 쏠리는 것이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왜 모두가 저 여인만 보는 거지…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데.”

소녀의 눈빛은 질투와 슬픔으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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