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시가 남긴 흔적
전통시장을 지나 골목이 있고, 그 골목안에 책을 빌려주는 세책방이 있었다.
낡은 목재 간판 아래, 홍길동전, 춘향전, 사씨남정기 같은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책을 읽거나 빌려갔다. 종이 냄새와 먹 냄새가 뒤섞여 은은하게 풍겼고, 바람에 책장이 살짝 흔들렸다.
고은은 호기심에 이끌려 세책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책쾌가 앉아 있었다. 그는 서민의 소박한 한복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옅은 회색 저고리에 남루한 바지, 허리에는 낡은 끈을 묶고 있었다. 머리에는 간단히 상투를 틀었고,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어서 오시게. 읽고 싶은 책이 있는가?” 책쾌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훑었다.
책쾌는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는 혼잣말을 했다.
”대체 어디서 저런 옷을 구한거지? 처음보는 복장이군”
그녀의 손끝은 오래된 시집에 닿았다.
책장을 넘기던 고은은 문득 빈 페이지를 발견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붓을 들어 자신의 시를 적어 내려갔다.
바라봄의 고백
멀리서 그대를 바라보는 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눈빛만으로 마음을 전하려 한다.
햇살에 스며든 그대의 웃음,
내 하루를 밝히는 작은 별빛 같아
가까이 다가서고 싶지만
발걸음은 늘 멈추고 만다.
혹시 내 마음이 들릴까,
바람에 실려 스치는 눈길 속에
고백 대신 숨겨둔 떨림만 남는다.
그대여, 알지 못해도 괜찮다.
나는 오늘도 그저 바라본다.
첫사랑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한 사랑을 품은 채.
책쾌가 뒤에서 고은의 모습을 보고는 말을 걸었다.
“찾는 책이 있는가? 따끈 따끈한 필사책 들어온 게 있는데 한 번 보시겠는가?“
고은은 당황하며,
”아니에요, 다음에 올게요“
그러더니, 후다닥 책을 덮어 놓고는 세책방을 나왔다.
며칠 뒤, 한 선비가 세책방을 찾았다.
“또 오셨는가. 오늘은 새 책이 들어왔으니 한 번 보시겠는가?“
책쾌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니, 선비는 미소를 띠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곳의 단골이었다.
“요사이 기이한 옷차림을 하고 거리를 다니는 여인이 있다 들었는데, 혹 보신 적 있는가?” 책쾌가 물었다.
“잘 알지. 멀리서 보아도 얼굴이 환하여 미모가 뛰어나더이다.” 선비는 대답했다.
“그 여인이 어디서 왔는지 아시는가?“
“내 어찌 알겠소. 다만 길을 잃었다 하더이다. 그나저나 새로 들어온 책이나 살펴보시게.”
선비는 독서광이라 웬만한 책은 다 봐서 새로 들어온 책 위주로 찾고 있었다. 책쾌는 무심히 책 몇 권을 건네주었다. 선비는 책을 펼쳐보다가, 낯선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숨을 고르듯 시집을 꼭 쥐며 속삭였다.
“이 글은… 누구의 손끝에서 나온 것인가?“
그 순간, 책방 사이 공기가 미묘하게 흔들리더니 낮은 속삭임이 은밀히 울려 펴진다.
글자 사이로 금빛 실이 스며들며 은은하게 빛을 낸다.
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글자들을 감싸며, 두 사람의 인연을 길게 이어주고 있었다.
속삭임은 바람에 실려 귓가에 스며들었다.
“인연은 시대를 넘어 이어진다. 같은 영혼이 다시 태어났을 뿐이다.”
선비는 눈빛을 떨리며 시집을 꼭 쥐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끌림이 번져갔다.
낯선 글씨, 낯선 존재…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
등잔불은 다시 잔잔히 흔들렸고, 금빛 실은 서서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시집 속 글과 선비의 가슴 속에 새겨진 떨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