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 2017 한국사 교과서 편찬과 관련한 이야기 ①
최근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뉴라이트 성향의 서술 내용, 내용 자체의 부실함, 위키피디아 표절 등 검색만 하면 뉴스가 줄줄이 뜨지요.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해 '좌편향' 논란이 인 이래 교학사 한국사의 '우편향' 논란까지 교과서 문제가 불거지면 초점은 저자와 출판사에 맞춰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단순하게 볼 사안이 아닙니다. 모든 논란 거리에는 그 논란을 불러일으킨 총체적 배경과 세세한 현실적 문제가 뒤섞여 있기 마련이죠. 역사 교과서 편집자 생활을 잠시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몇 마디 해보려 합니다.(혹 사실 관계에 오류가 있다면 바로잡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대 후반 이상의 연령이시라면 6차 교육과정, 7차 교육과정이란 명칭에 익숙하실 겁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꽤 긴 주기를 두고 전면적으로 교육과정을 개정하는 방식이었죠. 그러나 2002년, 이러한 방식은 급변하는 사회 현실에 대응하는 데 적절치 않다는 판단에 따라 '수시 개정' 방침으로 바뀌게 됩니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95022
즉, 전면 개정이 아닌 수시 부분 개정으로 2~4년에 한 번씩 시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시 개정은 2007년 개정 교육과정부터 본격적으로 적용이 되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차 교육과정'에서 '○○○○년 개정 교육과정'으로 명칭도 변하였지요. 그리고 2년 뒤인 2009년 12월에 개정 된 교육과정이 고시됩니다.
수시 부분 개정의 취지가 '교육과정의 안정적 확보 차원에서 기존 교육과정의 기본 철학과 체제를 유지하되 운영상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수준에서 개정의 범위를 최소화한다'는 것이지만, 교육과정이 바뀐다는 것이 대전제이기 때문에 결국 교과서는 새로 출판해야 합니다.
과거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에서 펴냈던 국정 교과서와는 달리 검정 제도를 바탕으로 일반 출판사에서 펴내는 역사 교과서의 경우엔 국편의 검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게다가 검정을 통과한 이후에도 채택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개정된 내용만 적당히 수정한다거나 체제와 디자인을 살짝 바꿔주는 정도로만 교과서를 수정하지는 않습니다.
기존 저자가 그대로 가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은 경우 새로이 저자를 구성해야 합니다. 다시 새 원고를 받아 편집 해야 하며, 면을 구성하는 요소와 디자인을 대대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각각의 출판사들은 시장 경제 속에 내던져진 경쟁자일 따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교육 부문 출판사의 매출 비중에서 교과서 매출액이 차지하는 부분은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자를 면치 못하거나 체면치레할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하지만 교과서의 채택률은 그 출판사의 브랜드 가치를 결정 짓고, 교재나 공부방과 같은 교과서 출판 이외의 사업 부문 매출액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전 직원이 그야말로 사활을 걸고 교과서 작업에 골몰하게 됩니다.
개정 교육과정이 공시되었다고 바로 교과서 제작에 돌입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를 중심으로 약 2년 여의 기간을 거쳐 개정된 교육과정에 따라 구체적 적용을 위한 각 교과목의 '집필기준'이라는 것을 마련하게 됩니다.
교육부의 정의에 따르면 '집필기준은 교육과정의 목적과 취지에 적합한 교과용 도서를 개발하기 위해 편향성이 우려되는 4개 교과목 [국어, 도덕, 역사, 경제]에 대하여 관점의 균형성과 내용 표현상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마련한 교과용 도서의 집필 지침'입니다.
(교육과학기술부 보도자료 첨부 : 12-30(금)즉시보도자료(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hwp)
역사 교과서의 경우 집필기준을 교육부가 국편에 의뢰하여 개발토록 하는데 이 집필기준이 최종 확정되면 저자와 편집자간 회의를 거쳐 구체적인 집필 방향과 면 구성 방안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정리하자면 2009년 12월에 개정 교육과정이 공포되었고, 2011년 11월 9일에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마련, 같은 해 12월 30일에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한국사, 세계사, 동아시아사) 집필기준이 마련된 겁니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2013년부터 쓰이고 있고,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2014년부터 현장에서 쓰일 예정입니다.(적용 연도의 차이는 교육과정 상의 문제도 있겠지만 한 출판사에서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모두 개발하는 경우 개발 기간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됐을 겁니다)
과정이 대충 이해되셨으면 의아해하실 분들이 계실 겁니다. 네. 교과서를 개발하는 기간이 턱없이 짧다는 것이죠. 교과서가 무슨 계간지도 아니고 '그까잇 거 대애충~!' 만들어 낸다는 건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만들어 내야 합니다.
여기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지요.
우선 저자 구성입니다.
이전부터 저자 관리를 잘 해 온 출판사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저자를 구성하는 것부터 난관입니다. 학문적 인지도, 집필 능력, 성격 등을 다 고려하여 좋은 저자를 뽑으면 금상첨화겠지요. 하지만 이조차도 경쟁입니다.
평판 좋은 저자들을 타 출판사에서 선점해 버리면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시간도 없는데 말이죠. 논란의 여지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저자를 영입하는 경우, 이러한 현실이 작용하였을 공산도 큽니다.
전공 분야에서 나름 인지도 있는 저자들을 섭외했다고 치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고심하며 내용을 집필할 시간이 충분치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꼼꼼한 원고를 기대하는 건 길가다 받은 5만 원 모양 상품권이 알고보니 진짜 5만 원짜리일 가능성 만큼이나 희박합니다.
그나마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고야 만다는 의지를 가진 분들은 꾸역꾸역 어떻게든 써 옵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집필 도중 유체 이탈을 경험한다거나 울리는 전화벨 소리도 인식 못하는 멘붕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또 다른 분들은 참고 자료를 참고하는 데에 그치지 않기도 합니다. 이해가 아예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정말 큰 문제는 편집자들입니다.
사실상 책을 만들어 내야 하는 편집자로서는 짧디 짧은 개발 기간 속에서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되고 이는 자연히 엄청난 노동 시간으로 귀결됩니다.
책을 만들어 내는 감성과 교양을 기를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꾸역꾸역 만들어내야 합니다. 미진한 원고의 보완을 부탁하는 것도 한두 번입니다. 그렇게 꼼꼼히 원고를 검토할 시간조차 없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과서는 만들어집니다. 검정 심사본 접수 기한 안에 어떻게든 만들어서 국편에 제출합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던 윤동주의 시구처럼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데 교과서가 이렇게 쉽게 써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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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딴지일보> 2013년 9월 24일자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