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후회의 시작
그날, 어느 2월의 목요일 오후.
서경자는 버스 안에 앉아 있었다. 손에 든 재계약서가 무겁게 느껴졌다. 종이 몇 장이 이렇게 무거울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손목이 저렸다.
월세 인상액. 커피 서너 잔 값.
2년을 기다린 결과가, 이것이었다. 이게 실화야.
'내가... 완전 착각했구나.'
5%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내 나름대로 해석을 했던 거였다. 5%면 꽤 되는 줄 알았지. 착각이었어. 완전한 착각.
버스 창밖으로 서울의 거리가 스쳐 지나갔다. 높은 빌딩들, 오가는 사람들, 깜박이는 신호등. 3년 전, 윤하영과 처음 계약했을 때 그녀는 희망으로 가득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미래가 환하게 빛났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4년 전으로 돌아가면.
오십 대 중반. 슈퍼마켓 캐셔로 12년을 일했다. 남편은 정년이 코앞이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
노후가 불안했다. 국민연금? 남편 것과 내 것을 합쳐봐야 얼마 되지 않았다. 과연, 이것으로? 게다가 그것도 예순다섯이나 되어야 나온다는 그 돈. 몇 십 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래서 시작했다. 오피스텔 투자.
그때는 세상이 달랐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부동산 시장이 불타올랐다. 뉴스마다 집값 상승 소식이었고, 유튜브에서는 "지금 사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는 말들이 넘쳐났다. 청약 경쟁률이 천 대 일을 넘기는 오피스텔도 있었다.
사람들은 미쳤다는 듯이 집을 샀다. 전세가 없어서, 월세가 치솟아서, 어떻게든 내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거리에 가득했다.
경자도 그 열기 속에 있었다. 1년을 공부했다. 유튜브를 봤다. 밤늦도록. 책을 읽었다. 부동산 카페를 기웃거렸다. 새벽까지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경자는 망설였다.
공부만 했다. 보기만 했다. 실제로 매물을 보러 다니지는 못했다. 무서웠다. 12년 동안 모은 돈이었다. 아이들 학비에, 주거비에, 생활비에 조금씩 보태주고 남은 돈. 전 재산이었다.
그렇게 2022년이 되었다.
그해 봄까지도 시장은 뜨거웠다. 하지만 여름부터 뭔가 이상했다. 금리가 오르기 시작했다. 규제가 쏟아졌다. 뉴스 톤이 바뀌었다.
"이제 집값 떨어질 거야." "거품 꺼진대." "지금 사는 사람은 바보야."
경자는 더 초조해졌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가? 아니면 정말 떨어지는 건가?'
그리고 그해 가을.
경자는 결심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매물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조영달 소장을 만난 건 그때였다. 강남역 근처, 작은 중개사무소. 1층.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는 밝은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고, 손짓이 빨랐다.
"사모님, 좋은 매물이에요! 기존 세입자 끼고 포괄승계 하시면 완벽합니다. 후회 안 하실 거예요."
'주택 임대 사업자 포괄승계.'
조영달의 설명을 들었다. '기존 세입자 끼고', '포괄승계', '5% 인상 상한'. 알기는 했다. 대충은 이해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안에 어떤 함정이 숨어 있는지는 몰랐다. 세금 혜택이 있다는 말, 안정적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을 뿐이었다.
"요즘 다들 하는 거예요! 빨리 결정하셔야 해요."
경자는 그 말을 믿었다. 믿고 싶었다.
남편은 반대했다. "당신 미쳤어? 우리 돈 다 털어서 뭐 하자는 거야?" 하지만 경자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해 겨울, 계약했다.
기존 세입자를 끼고 주택 임대 사업자 포괄승계로. 12년 동안 모은 거의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 계약 직후부터 등록 서류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계약하고 나니, 뉴스가 더 어두워졌다.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보였다. 레고랜드 사태라는 말도 들렸다. 전세 사기라는 단어도 보였다.
'괜찮겠지. 나는 주택 임대 사업자잖아. 안정적이라고 했잖아.'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음 해 봄.
2023년 2월. 기존 세입자가 나가고 새 세입자 윤하영을 만났다. 젊은 여자였다. 도도해 보였다. 2년 전세 계약을 맺었다.
3월까지 주택 임대 사업자 포괄승계 등록 절차를 모두 마쳤다.
슈퍼마켓 동료들에게 자랑했다. "나 임대사업자 됐어." 미숙이가 눈을 크게 떴다. "와, 대단한데?" 영선이도 부러워했다. "언니, 완전 부자 되겠네."
경자는 웃었다.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2023년. 부동산 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규제가 쏟아졌다. 스물여덟 가지나 된다고 했다. 오피스텔이 폭락했다. 경자가 산 가격보다 몇 천만 원씩 떨어졌다는 말이 들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위로했다. '괜찮아. 나는 전세로 돌렸으니까. 월세 받으면 되니까.'
그리고 2년이 흘렀다. 2025년 2월.
재계약의 날, 경자는 기대했다. 주변 오피스텔들이 월세를 많이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그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월세요? 네... 3만 원대예요."
"...네? 그게 다예요?"
"네, 5% 인상이라 그게 맞아요."
전화를 끊고 나서야 경자는 깨달았다.
5% 인상. 법적으로 정해진 주택 임대 사업자의 상한선.
세금 혜택이라는 게 거의 없었다. 1년에 커피 서너 잔 값.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것, 임대료를 5%밖에 올릴 수 없다는 법적 제약.
[이것이 바로 5%의 덫이었다.]
중개사 사무소에 전화했을 때 조영달의 목소리는 여전히 밝았다. "사모님, 주택 임대 사업자시잖아요. 5%까지만 올릴 수 있어요. 법으로 정해져 있어요."
10년 의무 임대. 5% 상한. 계약 갱신 청구권.
조영달은 이런 것들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경자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달콤한 말들만 귀에 들어왔으니까.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경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경자는 생각했다. '기록하자.' 내가 겪은 이 모든 일을. 실패를. 후회를. 그래서 적어도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당하지 않도록.
집에 도착했다. 열쇠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문을 열었다. 텅 빈 거실. 남편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
밤이었다. 경자는 책상 앞에 앉았다. 펜을 들었다. 노트를 펼쳤다.
"안녕하세요. 저는 50대 중반의 평범한 주부입니다."
첫 문장을 썼다.
"저는 실패했습니다."
글자가 번졌다. 눈물이 떨어졌다.
"하지만 여러분은 실패하지 마세요."
창밖으로 달빛이 쏟아졌다. 차갑고 환한, 2월의 달빛.
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5%의 덫에 걸린 한 여자의 기록. 실패했지만, 누군가는 이 기록으로 같은 실수를 피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