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했던 한 인물을 위하여! -친구의 49재에 부치는 글-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끝이 정해진 삶을 두고 모두들 애면글면하며 사는 모양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가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이 좋은가, 왜 사는가 등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고 마땅한 답을 찾아 헤맨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죽음의 세계를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상상하며 살게 된다. 종교적 교의에 기대어 풀어보기도 하고 철학적 물음에 답을 달기도, 또는 해석하기도 한다. 과학적 탐구를 통해 죽음은 자연현상의 일부라는 것을 밝히기도 한다.
보고싶어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아파 죽겠다, 웃겨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뒤집으면 강조가 더 된다. 죽도록 보고싶다, 죽도록 배고프다, 죽도록 아프다, 죽도록 힘들다....
죽지 못해 산다는 표현도 있다. 이런 표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떠들어대는 말 속에 한두가지씩 꼭 들어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아지면 그렇게 된다.
작년, 작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또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생각하며 소설을 썼다고 한다.
역사적 사건, 즉, 5.18 민주화운동이나 제주 4.3항쟁에서 희생된 분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를 도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지고 책을 썼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죽음이라는 개념이 들어간 수많은 표현들은 결국, 타인에게 좀더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친구의 말기암 소식, 우선 와닿지가 않았다. 놀랍고 슬프고 답답한 마음은 나중이었다. 직접 대면해서 진단과 치료계획에 대해 들을 때에도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니 잘 되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말기암이다. 누구보다 의학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그가 어떤 느낌으로 진단을 받아들였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치료 과정은 자체로 이미 그가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제한된 시간 속에서 분투했을 친구를 생각하면.....
담담하게 자신의 병을 설명하는 모습에서부터 그는 냉정했다.
뭐 그럴수도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가 그랬다.
게다가 다른 친구들에게는, 혹시 모를 일이니 검진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의 치료계획을 무심한게 남 일처럼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웠다. 확실히 그는 달랐다.
하루하루 일상을 전과 같이 유지하는 모습, 쓰러지기 직전까지 사무실에 출근해서 깔끔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 좋아하던 과학서적이나 철학서적, 대문호의 대하소설을 평소와 같이 아무일 없다는 듯 읽으면서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
생각할수록 대단한 멘탈리티다.
지인들과 보드게임도 하고, 심지어 골프 라운딩까지…
그는 달랐다.
작년 , <우리는 왜 죽는가, Why we die?>라는 책을 읽다가 친구 생각을 했다. 지은이, 벤키 라마크리슈난은 이 책에서 감기나 암은 그 바이러스와 세포가 발견된지 벌썬 백년이 훌쩍 넘었지만 현대의학,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진보됐다는 과학적 발명이나 발견으로도 현재까지 치료에 진전된 성과는 거의 없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이에 더해 인간의 수명은 의학이 발전한 덕이라기 보다는 환경이 위생적으로 바뀐 덕이라고 말하고 있다.
약을 쓰고 화학요법도 사용했겠지만 친구는 누구보다 의학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직업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과정과 결말을 짐작하고 있었을거다.
담담하게 받아들이긴 했을지 모르지만, 막상 본인의 일로 닥친 일이다보니 두렵기도 외롭기도 했을 것이 틀림없다.
간간히 해맑은 표정으로 만나 좋은 얘기만 하다 헤어졌지만.... 친구는 완전한 고독 속에서 살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왜 죽는가>에서 저자 -참고로 저자는 영국왕립학회 회장이고,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가 기대수명에 대해 언급하는대목이 인상적이다.
수명을 200년 300년, 어쩌면 불멸에 이르기까지 길게 늘이려는 노력이 과연 우리 인간에게 유익할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오래 사는 일이 과연 축복이기만 하겠느냐는거다.
대부분의 사피엔스들은 30~40대에 최고의 성취를 이룬다고 한다. 우선 자녀를 세상에 내놓는 위업을 달성하는 시기는 대부분 30대다. 이후는 어쩌면 여생에 가깝다는거다.
위대한 작곡가들 대부분이 3~40대에 명곡을 남겼다고 한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를 봐도 그렇다. 유명한 화가들도 대부분 그런 것 같다.
이번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도 40대에 소설, <소년이 온다>를 썼고, 맨부커상에 빛나는 <채식주의자>는 삼십대에 쓰지 않았던가.
<우리는 왜 죽는가>를 친구는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또한 평소 삶에 대해 진지했다. 어쩌면 자신도 어떤 면에서는 바라던 것들을 이룬 경지에 이르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성취를 말하는 대목에서 약간의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 하지만 은퇴를 앞둔 나이다. 인생 2막에 펼쳐질 여유로운 일상에서 그간 참아왔던 무엇들을 실컷 해보리라 기대했을 친구가 겪었을 상실감을 생각하면 나의 이런 언급은 망언이다.
그러함에도 한마디 덧붙이자면,
유신정권 시절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전기고문을 받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다 60대 초반에 작고한 천상병 시인은, 유고시집만 두번을 낸 일화로 유명한데, 그는 돌아가시기 전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독백을 한다.
아내가 찻집을 해서 돈 걱정이 없으니 부족함이 없고, 대학에서 공부했으니 배울만큼 배워서 부족함이 없고, 예쁜 아내가 있어 그 또한 부족함이 없고, 시인이니 명예도 얻어 그 또한 부족함이 없고, 자녀가 없어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매일 아내가 막걸리를 사다주니 부족함이 없고, 편안한 집도 있으니 부족함이 없고, 게다가 하느님을 믿는데 세상에서 가장 힘 쎈 분이 자신의 빽이라서 최고로 든든하니 그 또한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떨면서도 그는 행복하게 웃었다. 자신은 행복한 인생을 살았노라고~
떠나도 아쉬울 거 없다고….
돌아가기 전 친구의 평온한 얼굴을 기억한다. 그도 시인 못지 않은 학력과 경력, 가족과 직업, 그리고 시인은 갖지 못한 반듯한 자녀들까지 두었으니 인생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결말이라고 미소지으며 받아들였을까?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작별은 참 슬픈 일이다. 피를 나눈 가족, 그리고 오랜 기간 정을 나눈 지인들과의 갑작스런 사별이라니…. 그 찢어질듯한 감상이 오죽했을까!
목소리와 표정, 무시로 하는 몸짓까지 생생하다.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를 잃은 지 얼마 안된다. 조문을 와서 유일하게 눈시울을 붉힌 친구를, 연이어 다른 세상으로 보내다니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친구의 운명은 언젠가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도 닥칠 예정이다. 연전에 친구가 여럿 사이에서 쌩뚱맞게 한 질문이 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세상을 뜰까?”
우리가 이제 그런 질문을 할 나이가 된 것인가. 했지만 그때 이미 그 친구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걸까? 발병 전이었던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친구가 인생 2막에 하고 싶어 한 일은 뭐였을까.
직장구해 결혼하고 아이낳고 자리잡기까지 고생하다, 중년에 접어들어 한달에 한번씩 만나 골프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웃고 떠드는 시간을 낙으로 삼았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찰나처럼 지나갔다.
7년 전 일본 구마모토 현의 아라오 시에 2박3일 놀러갔던 일이 있다. 은퇴하면 일년에 한번씩은 가자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여유있게 삶을 누릴 기회를 잃게 된 것이 못내 헌스럽다.
남다른 생각의 깊이와 품위를 보였던 친구다. 냉정하게 사안을 파악하고 최대한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공적, 사적 문제를 해결하던 친구이기도 했다.
학창시절에도 그리고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동기들에게 먼저 다가가 따뜻한 마음을 전하던 친구였다. 이것은 상가에서 확인이 됐다. 거의 모든 학교 동기들이 성심으로 조문 했으니 말이다.
며칠 전 친구는 거짓말처럼 꿈에 나타났다. 꿈 속의 친구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학 동기생 둘과 사당동 어딘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친구가 언제 다 나았지?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그 상황에서는 완쾌되기가 어렵다던데...‘하는 생각을 꿈속에서도 했었다.
그가 단톡방에 마지막으로 올렸던 도서, <신도 버린 사람들>을 찾아 읽어보려고 한다. 카스트제도의 희생양인 불가촉 천민이 곡절을 이겨내고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는, 커다란 울림이 있는 실화라고 한다.
목차에 ‘내 존엄성을 내가 입증한다'는 목록이 보인다. 친구 아내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끝까지 존엄성을 잃지 않고 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두려운 것은 죽음이나 노화가 아니다.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녹스는 삶이다.“
-법정스님-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분명한건 존엄하게, 녹슬지 않도록 삶을 유지하다 마무리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거다.
친구는 녹슬지 않은, 존엄한 삶을 살다 갔다.
안녕, 잘 가시게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