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밝혀두는 것 몇 가지가 있다. 이 모든 생각은 철저한 나의 관점에서 해석된 것이며, 일부 각색된 부분이 있다. 추호도 그들의 신상정보를 밝힐 생각이 없으며 되레 밝히고 싶은 것은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나’에 대한 의문이다. 또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이다. 이 모든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나는 이 답답함을 글로 옮긴다.
소개팅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건 2020년 하반기 때부터다. 운 좋게 취업을 하게 됐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던 시기였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다가 한시름을 놓게 되니까 내 주변 사람들은 다들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렇다 할 새로운 만남이 없어서인지, 남들 다 한다는 연애를 내가 못해서 마음이 조급해진 건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나는 자연스레 소개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많은 걸 바란 건 아니었다. 다만 남들 못지않은 평범한 연애를 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거 하나면 됐다. 하지만 소개팅은 일자리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소개팅은 ‘구인구직란'처럼 어떤 수요가 없이는 성사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어느 정도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이뤄지는 일이다. 또한 수요 그 자체만으로 소개팅이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검증을 거친 끝에 서로 얼추 비슷한 취향이거나, 양자 간 소개를 받겠단 동의가 있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이 부분이 상당히 인위적인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해서라도 옆에 누군가를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의 외로움은 이 ‘인위적 과정’을 무색하게 만든다.
설사 구인구직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끝은 아니다. 소개팅은 사실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일단 일정기간 연락―카카오톡이나 전화―을 통해 서로를 탐색하는 기간을 거친다. 면식 없는 사람과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아마 나는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매뉴얼’에 입각해서 메시지를 주고받으려고 했던 것 같다. 상대방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연락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최대한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밥은 먹었는지, 뭘 먹었는지, 잠은 충분히 잤는지, 지금 출·퇴근하는지 등 그 사람에 관해 일일이 캐묻지 않으면서도 문답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무난한 대화를 지향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잘 자요’, ‘잘 잤나요’……. 이것은 겉도는 말인 게 분명했지만, 안 할 수도 없는 상투어였다. 이런 얘기가 오갈수록 사람 사는 게 거기에서 거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환기시키고 향초 켜고 밥 먹고 똥 싸고 책 읽고 영화 보는 게 내 시시한 생활의 면면이었고, 나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상대방‘들’은 이런 내 모습을 처량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아니, 특별히 ‘재미’가 있다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착하게도 이 시시한 생활의 관성을 ‘부지런하다’며 칭찬해주었다. 그걸 ‘칭찬’으로 알아들었던 나는 지금 돌이켜보면 바보 천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마 그녀들은 조금 색다른 사람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자기계발’이라든가 취미활동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에 속했고, 되레 그런 것을 경멸하는 쪽에 가까웠다. 해서 나는 나의 생각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반골’ 기질을 보였다간 피곤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숨기노라고 숨겼지만 사람들은 내가 피곤하다는 걸 진작 깨달았는지, 만나서 차 한 잔 마시기도 전에 ‘좋은 사람 만나실 거예요’라는 통보를 했다. 쉬는 날이면 거의 종일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상을 재미있어할 이가 누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최근 읽은 인상 깊었던 책들은 솔제니친이니 프리모 레비니 하는 그런 전쟁 문학들이었고, 최근 본 영화는 ‘1917’이라는 전쟁 영화였다. 이런 얘기를 서슴없이 꺼낼 수 있는 사람을 만나려 드는 건 내겐 사치였고, 소개팅을 주선하는 사람마저 피곤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거쳐 간 사람이 벌써 몇 주 사이에 3명이다. 첫 번째 사람은 하루 반나절 만에 돌연 연락이 두절되었고, 두 번째 사람은 약속 하루 전에 ‘미안해요. 오빠는 꼭 좋은 사람을 만나실 거예요’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약속 두 시간 전에 ‘죄송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라고 통보를 해왔다. ‘나중에 한가해지면 연락을 달라’고 하고 차를 돌렸다. ‘나중’이란 말은 ‘끝내자’는 말의 동의어다. 기약 없는 말은 곧 흐지부지 머릿속에서 잊히리라. 급한 일이 생겼다는 연락은 도로 위를 달리고 있을 때 받은 것이다. 잠시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나 보다. 유턴할 때 어찌나 핸들을 급하게 꺾었는지, 오른쪽 바퀴가 살짝 뜨는 느낌을 받았다.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한적한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점심도 쫄쫄 굶은 채―분명히 밥 먹고 만나자고 했는데도 굳이 밥을 먹겠다고 해놓고선!―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연락이 끊어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한 시간 정도 잠자코 생각해보았다. 나의 진지한 면 때문일까, 아니면 내 까탈스러운 취향 탓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만남이 성사되기도 전에, 그러니까, 취업으로 치면 최종 면접으로 가기 전에 전부 서류전형에서 낙방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물론 취준생 시절 수차례 서류에서 낙방했을 때 낮아졌던 자존감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그때는 그래도 내가 부족한 인간이 아니며, 적어도 실패는 하지 않을 거라는 내 ‘능력’에 대한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나라는 인간이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연달아 실패한 소개팅은 정말 인간적인 자존감을 바닥나게 했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소개팅 주선자에게 상대방의 사진―물론 상대는 나의 사진을 봤다―을 받지도 않고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있으니까. 일방적으로 나만 받겠다고 설쳐서 성사된 소개팅도 아니었다. 분명 쌍방의 동의로 시작된 연락이었는데 나는 상심이 컸다. 곧 만날 것처럼 되어 있었던 그 약속들이 깨지게 된 원인이 뭘까. 아마 이런 진지한 자세가 패착이 됐을 것이다. 사실 나도 나름 재미있는 사람이다. 나는 시집이나 읊으며 서생처럼 운이나 띄우는 사람이 아니다. 문학이나 미술이나 하는 따위의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니어도 얼마든 웃음을 줄 수 있단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한 법. 일이 다 벌어지고 나서 구구하게 얘기를 늘어놔 봤자 소용없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기로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동안 죽을 둥 살 둥 노력해서 겨우 취업했다. 누군가의 말대로 소개팅이 취업과 비슷하다면 여기에서 포기해선 안 된다. 소개팅도 거기에 준하는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