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교육을 들으면서 느낀 생각
학과 시간에 웨어러블 캠에 찍힌 소방대원의 응급처치 영상을 봤다. 대원 한 명이 심정지 환자에게 흉부압박을 하는 동안 두 명의 대원은 부산하게 제가끔 조치를 한다. 장소만 골목길이었지, 그곳은 짐짓 응급실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응급처치는 차분한 정적 속에서 일제히 이뤄졌다. 누구도 소리치거나 채근하지 않았다. 심폐소생술은 성공했지만, 그 환자는 끝내 병원에서 숨졌다고 했다. 이제 나는 이런 일을 수도 없이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도 이 일을 선택하고 여기까지 온 이상,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을 굳게 먹는다면 안타까운 상황들은 어느 정도 무뎌지리라. 이 일이 익숙해지면 나도 성숙한 소방관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하지만 ‘무딤’과 ‘성숙’은 다르다. 손가락이 파쇄기에 빨려 들어가거나, 피 칠갑을 한 사람의 참상을 견뎌내는 그 자체를 내면의 성숙함으로 보고 싶진 않다. 누군가를 돕는 일이 보람찬 일인 줄은 알지만, 거기에 그칠 수는 없는 것이다.
말기 암 치료를 받고 있는 한 신경외과 의사의 문장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외과의로서 얼마나 오만했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최대한의 책임감과 권한으로 환자를 돌보려 했지만, 그것은 기꺼해야 일시적인 책임이고 덧없는 권한이었다.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이 될 때』, 이종인, 흐름출판, 2016, 198면.
폴 칼라니티는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면서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말기 암 판정을 받을 거라 생각했겠는가. 그는 의사가 아닌 죽음 앞에 직면한 나약한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 그는 치밀했다. 아픈 몸으로 환자들의 수술을 집도하면서,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한다. 그것은 말 못 할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리라. 몸이 건강했다면 그는 계획대로 의사 겸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한순간에 청사진이 무너진다고 상상해보라. 그는 굴하지 않고 의사로서, 그리고 환자―곧 죽게 될 슬픈 인간으로서―로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았다. 더디지만 차근차근 자신의 인생과 그 의미를 곱씹는다. 그 지독한 의지를 나는 본받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질문하게 된다. 그저 누군가를 돕기만 하면 나는 괜찮은 인간으로 거듭나는 걸까? 이 일을 사무적이면서도 능숙하게 해낸다면 그걸로 끝일까? 아닐 것이다. 노끈에 매달린 주검이 된 인간을 보면서, 과연 사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라고 신변을 비관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 또는 내가 신열을 앓고 쓰러지지 않는다는 법이 있을까. 소방관과 요구조자로 구분 짓지 않고 폴 칼라니티가 말하는 ‘일시적인 책임과 덧없는 권한’을 내려놓은 인간으로서 생각할 순 없을까. 아무리 이렇게 질문해도 내가 말하는 삶은 말뿐인 삶밖엔 되지 않는다. 어떤 인간으로 살아야 할지, 어떤 소방관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