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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힘행 Oct 09. 2021

놀면서 터득한 인생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최대한 방해하지 않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 몰래 관찰하곤 한다. 

한 뱃속에서 나왔는데 어쩌면 저렇게 4인 4색인지, 놀랍고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아이들은 천성대로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 놀면서 배운다. 심심할 때 만들어내는 놀이야말로 가장 좋아하는 내 놀이이다. 노는 걸 보면 그 아이가 문과로 갈 건지 이과로 갈 건지 정도는 가름이 난다. 내가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나는 사내아이처럼 뒷산으로, 개천가로 돌아다니면서 놀았고, 집으로 돌아오면 TV를 보면서 세상 물정을 배웠다. 놀면서 배우는 것은 산지식이 되어 몸에 체득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자전거를 타는 법이나 수영을 습득하면 오랜 시간이 지나 해보아도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선생님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사람은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이 아닌, TV에서 만난 '맥가이버'다. 그는 나에게 사는 법을 알려준 나의 선생님이었고, 롤모델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맥가이버가 방영되는 날이면 TV 앞에 앉아 초집중해서 보았다. 엄마는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가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두 눈에 불을 켜고 봤느냐면 맥가이버는 재미는 물론이고,  내게 '인생 수업'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 든 이른바 '맥가이버 칼' 하나로 주변에 있는 어떠한 물체든지 이용하여 궁지에서 탈출하거나, 누군가를 구출해낸다. 맥가이버가 어려움을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하나가 버릴 것 없는 레슨이었다. 그의 수제자답게 나는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수수께끼를 대하듯 접근했다. 선임자가 시도해서 실패하면 바로 내 차례가 왔다고 여겼다. 남들이 포기한 걸 내가 주워서 쓸모 있게 바꿔놓으면 그게 나의 존재의 이유가 돼주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교 생활 8년 동안, 나는 '해결사 김조교'로 통했다. "TV가 안 켜져요.", "VCR이 작동이 안돼요.", "스크린이 안 내려와요." 등등, 문제가 있는 그곳에 내가 가면 뺀질거리던 기기들이 작동을 시작하였다. 입시와 콩쿠르 일정표를 만드는 업무에서 수십 명 교강사들의 개인별 일정을 겹치지 않게, 시간과 동선을 감안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할 때 나는 희열을 느꼈다. 몸에 베인 민첩함은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튀어나온다.


 

나의 최애 선생님, 맥가이버


어느 날, 승주가 불편한 얼굴로 턱에서 ‘딱딱’ 소리가 난다고 호소하였다. 나는 마치 전문의가 진찰하듯이 물었다. "어느 쪽이죠?" 아이는 "왼쪽입니다." 하였다. 나는 곧 아이 뒤로 가서 섰다. 그리고 내 오른손으로 아이 오른쪽 귀를 누르면서, 왼손으로는 신속하게 아이 왼쪽 뺨을 눌렀다. "우두득!" 단 한 번의 손동작으로 뼈 맞춰지는 소리가 났고, 환자의 환한 미소를 통해 턱이 교정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당분간 입을 크게 벌리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도 삼가세요." 나란 사람은 평화의 순간보다는 위기의 순간이 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면하기를 실로 잘한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하게 내 인생에 적용한 맥가이버의 가르침을 연마한 결과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강렬한 한 장면이 있다. 바로 ‘지붕 뚫고 하이킥!’을 찍은 것이다. 이 단편 영화? 는 내가 평생 도전했던 각종 도전기에 첫 페이지와도 같다. 도전이란 내게 있어 모험이고, 비상구이며, 놀이터이다. 옛날 우리 집은 홍은동 산동네에 있었다. 마당 아래로 다른 집 지붕이 이어지는 산동네 풍경을 상상해보면 좋겠다. 마당을 경계로 난간이 둘러쳐져 있었다. 나는 철봉 하듯 난간 타는 것을 좋아했는데, 자고로 난간 타기는 바깥쪽으로 타야 제대로 스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스릴을 만끽한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했다. 나는 추락했다. 떨어지는 와중에 시간의 축이 잠시 멈춘 듯, 온갖 걱정들이 스쳐갔다. 외할머니 불호령이 떠올랐다. 아니다, 분명 꾸지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빗자루가 남아나지 않겠군.' 깨진 지붕 비용도 걱정되었다. 엄마의 욕소리도 들렸다. ‘우째 이런 일이?'... 마침내, 나는 아랫집 슬레이트 지붕을 가볍게 부수고, 빈 장독 두 개를 깨고 기절하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다행히도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팔꿈치를 조금 긁히고 꼬리뼈가 얼얼했다. 엉거주춤 일어나서 깨진 지붕과 장독을 대충 한쪽에 모았다. 그리고 골목 계단을 통해 집으로 기어 올라갔다. 이 추락사고 이후에 나는 일상의 단조로움을 피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종종 나의 비상구처럼 활용한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내가 시도한 가장 재미난 일은 길거리에서 액세서리를 팔았던 기억이다. 장사를 나서는 매일매일이 마치 무전여행 같았다. 수시로 콘테스트를 검색해본다. 각종 백일장, 공모전, 사진대회 등등,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생활의 경계선을 허무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물론 떨어지기 일쑤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이 즐겁다. 스릴을 만끽할 대가를 또 치러야 할 지라도 말이다.



물질적 한계가 익숙했던 시절, 불평하기보다는 해보지 않은 방법을 시도했던 나는 지금도 막다른 골목에서 묘안 짜내는 것을 즐긴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몇 가지 일회용품만으로도 그럴듯한 학습 교구를 만들어 내고, 수업 프로그램을 개발해내는 맥가이버 같은 나. 나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민을 게을리하지 않는 아이디어 연습 벌레다. 팬데믹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호주와 미국, 한국, 캐나다를 연결하여 ‘글로벌 자매 수다방’을 열었다. 그뿐인가! '라 스토리(LA Story) 선생님의 온라인 글쓰기 수업'도 내가 제안하였다. 코로나가 친 바리케이드를 뚫고 오히려 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닿은 것이다.  인생에서 맥가이버와 같은 멘토를 한 명 가슴에 지니는 것은 행운이다. 살면서 지붕 뚫고 하이킥 하는 명장면 하나 찍어둘 수 있다면 추락하는 순간이라고 해도 낙하산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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