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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혜원 Jan 31. 2023

생각이 건진 이야기

짐작과 착각으로

  책장에서 주역 공부하던 공책을 찾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찾을 거라는 확신이 없을 때 심장 박동 수는 더 빨라지고 잦은 이사로 버리기를 되풀이했던 내 손끝에 갖가지 상념이 물들었다. 도서관 서가에서 읽고 싶은 책을 찾는 일처럼 느긋하지 않았다. 공책이었는지 출력물이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스프링이 달린 공책 하나 끄집어내면 딸의 어릴 적 일기장이고, 출력물 묶음을 뺐더니 엉뚱하게도 금강경이었다. 아들 대학 입시 때 합격 기원 필사를 했던 기억이 어설픈 미소와 함께 떠올랐다. 필사의 정성이 부족했는지 아들은 삼수까지 했으니.

  다른 공책 사이에 4분의 1로 접힌 종이가 툭 떨어졌다. 아들의 초등학교 6학년 성적표다. 월례고사쯤 되는 시험이었나 보다. 자연 과목 외에 모든 점수가 평균 아래였다. 내 아들이 이런 성적표로 학교 다녔다는 걸 몰랐다. 그저 웬만큼은 하려니 짐작하며 살았고, 곧잘 학급 임원도 했던 터라 최상위권은 아니어도 위쪽에 있는 줄 착각하며 살았던 나의 불찰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행선 차표를 상행선으로 잘못 구매한 걸 나중에야 알아챈 것처럼. 보통의 엄마들처럼 문제집 푸는 걸 확인하며 채점하고, 공부하라고 닦달하지 않았던 내 책임이 더 크다고 인정하는 가슴 한 구석이 먹먹했다. 지나간 시간을 접듯 종이를 다시 접었다. 

  그런 흔적을 남기면서 성장한 아들이 장가가서 딸을 낳아 손녀를 선물 받았다. 축복과 기쁨을 손에 쥐고 온 손녀의 탄생! 작명까진 못하더라도 이름으로나마 음양오행의 균형과 조화를 맞춰보려고 오래전 공부했던 주역 공책을 찾다가 본 오래된 통계표였다. 

  곁에 없어도 신생아의 모습은 눈 감고 있는 얼굴 사진부터 하품하고 우는 동영상까지 거의 실시간으로 봤다. 직접 안아볼 수도 없고, 유리창 너머로 얼굴을 마주하는 면회일망정 당장 하고 싶은데 남편과 딸이 일정이 있어 다음 날로 미뤘다. 그리고 115년 만의 폭우가 쏟아졌다. 강남으로 출근한 남편이 빗물이 빠지지 않아서 주차장이 된 도로를 무사히 지나올지 걱정되어 방충망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빗물의 굵기를 수시로 측정했다. 입사 면접을 마치고 친구를 만난다는 딸이 잠시라도 비가 주춤할 때 귀가 길에 오르길 바라며 창밖의 빗소리에 자꾸 귀를 열었다. 폭우로 여기저기 피해가 속출하지만, 나의 가족들은 무탈하게 귀가할 거라는 바람도 짐작일까!

  아기들의 맑은 눈동자와 천진한 웃음을 보면 인생이 마냥 행복할 것 같다. 우리 아이는 천재일 지도 모른다는 착각과 함께. 삶이란 계획하고 바라는 대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일상의 사소한 희망들은 짐작이 되고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들은 착각으로 이어지면서 알 수 없는 길을 걷는 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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