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하는 가축들: 현대 문학이라는 거대한 기만

현대 시문학의 추세

by 광치


오늘날 우리 문학은 기로에 서 있다. 한쪽에서는 '난해함'이 곧 '문학성'이라는 착각 아래 대중과 유리되고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문학이 1분 내외의 '쇼츠(Shorts)'처럼 짧고 강렬한 자극으로만 소비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시 문화 역시 대중의 이해를 거부한 채 자기들만의 리그가 된 현대 미술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1. '쇼츠'가 된 문학: 깊이보다 자극을 쫓는 대중

최근 베스트셀러의 흐름을 보면 문학의 경박단소(輕薄短小)화가 뚜렷하다. 최진영의 『구의 증명』이나 정대건의 『급류』와 같은 작품들이 인기를 끄는 배경에는 물론 작품성도 있겠지만, 자극적인 설정과 지적 허영심을 적절히 충족해 주는 짧은 분량이 큰 몫을 한다.

이러한 경향은 창작 플랫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글쓰기 플랫폼들의 인기 게시글들을 보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1,000자가 넘는 밀도 높은 시들이 고평가 받았던 반면, 이제는 500자도 채 되지 않는 파편적인 문장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시는 이제 '읽는 예술'이 아니라 SNS에 올리기 좋은 '보여주는 예술'로 변질되었다. 사람들은 시의 본질을 탐구하기보다, 마음에 드는 짧은 구절을 필사하여 전시함으로써 자신의 지적 수준을 가장하는 '허영의 중독'에 빠져 있다.



2. 난해함의 권력화와 평단의 방관

문제가 대중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평론가들 역시 독창성이라는 명분 아래 난해한 시만을 문학적이라 추켜세우며 이 사태를 방조하고 있다. 때로는 시인조차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결과물을 두고 평단은 온갖 수식어를 붙여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시의 가치를 매기는 책임을 시인 스스로 지지 않고,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에게 그 짐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회피이다.

우리는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강요된 흐름에 매몰되어 있다. 과거 아르튀르 랭보는 정체된 문학인들을 향해 '앉은뱅이'라 일갈하며 전진을 촉구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앞을 향해 달릴 줄만 알았지, 낭떠러지를 보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며 질주하는 '스프링복(사슴의 일종)'의 무리와 다를 바 없다. 대중성을 잃고 고립된 현대 미술의 전철을 밟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형국이다.



3. 결론: 뒤로 물러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때

진정한 예술은 맹목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때로는 과잉된 독창성에서 벗어나, 문학의 본질이었던 '소통'과 '공감'의 자리로 되돌아올 줄 아는 '물러남의 용기'가 필요하다.

문학이 짧은 자극과 허영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창작자와 향유자 모두가 성찰해야 한다. 시가 다시금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하는 매체가 되기 위해서는, 화려한 수사나 자극적인 제목 뒤에 숨지 말고 본연의 무게감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