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무신론자
나는 악마를 좋아한다.
이 말은 종교적 반항이 아니라, 인간과 절대자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의문에서 출발한다.
만약 절대적 존재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라 악마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의 자유와 고통을 허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고통이 인간 존재에 필연적이라면, 그것은 신의 무능함이거나 잔혹함의 증거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여전히 그 존재를 신이라 부르며 사랑해야 하는가?
나는 이 물음들에 답을하기 위하며 바벨탑의 이야기는 단순한 오만의 상징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것은 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신을 끌어내리기 위한 인간의 반항 서사였다.
인간이 신이 만든 질서에 순종하기보다, 그 질서를 의심함으로써 문명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진보는 신의 뜻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신의 뜻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라고 했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
라고 선언했다.
이 두 문장은 인간의 윤리적 자율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도덕을 유지하려는 이시도들은 필연적으로 모순에 부딪히지만, 이 모순이야말로 자유의 증거가 된다.
신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판단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능력 말이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악마는 단순한 타락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이 된다. 신이 금지한 욕망, 의문, 탐구, 실험은 모두 악마적 속성 즉 욕망에 속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속성들이 과학과 예술, 문명을 만들어냈다.
신은 인간에게 절제를 명했지만, 악마는 인간에게 질문을 허락했다.
신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었지만, 악마는 인간에게 발전의 충동을 주었다.
결국 우리가 문명을 세운 것은 신의 축복이 아니라 악마적 욕망 덕분이었다.
물론 악마는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악을 경험한다. 욕망, 질투, 증오와 같은 감정들은 언제나 인간의 삶과 함께 실재한다. 그렇다면 악마란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진화를 촉진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결국, 신은 인간의 두려움과 도덕을 통제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시대는 끝났다. 신이 버린 사막에서 인간은 다시 새로운 절대성을 찾아야 한다. 그 절대성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의식과 사유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악마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통적 의미의 선에 도전하며,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신의 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증거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신의 지배로부터 해방된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끌어올리며 삶을 긍정했듯, 인간은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
그것이 신에 대한 가장 완전한 복수이며, 동시에 인간의 새로운 신앙이다.
신은 침묵한다. 하지만 인간은 말하고, 질문하고, 창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