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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니크 Oct 23. 2024

약속, 그 후

                      약속, 그 후

                         

     “아버지, 가셨다.” 휴대폰 너머 들려오는 엄마의 담담한 목소리. “네?, 아니 갑자기요? 퇴원하실 줄 알았는데.” 그러나 사실 갑자기가 아니었다. 주치의의 경고성 메시지를 누구 하나 듣고 있지 않았었다. 아버지가 입원한 지 두 달째다. 전에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었고 그래서인지 우리는 아버지의 병환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숨만 조금 거칠었을 뿐 산소 호흡기를 끼면 바로 좋아졌었고 아무런 다른 문제는 없었다. 겉보기에는 그래 보였다.

     아버지는 20대부터 흡연을 했다고 들었다. 하루 2갑도 피웠는데 덜 해롭다고 생각하여 한때는 토바코로 바꾸려는 노력까지는 하였으나 끝내 금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아버지 곁에는 늘 재떨이가 있었다. 희귀한 재떨이를 많이 모으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를 그리워하듯 거실 장식장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의 손때가 뭍은 물건들이라 필요 없어졌어도 버릴 수가 없다.

    세 살 연상연하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출 시 서로를 의지하며 손을 잡고 다니는 금실 좋은 부부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다툴 땐 흡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라도 끊을 법한데 금연이 그리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하루 두 갑에서 한 갑으로 줄인 것을 보면 어머니의 노력이 대단했다고 본다. 베란다에서 몰래 피우고 들어오다 들키면 이미 흡연 성공 후라서 인지 아니면 이제 뭐 어쩌겠나 싶어서였는지 빙그레 웃으며 변명을 늘어놓곤 했다. 어머니한테 담배를 압수당해도 어디서 인지 또 다른 담배가 나타났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쫓고 쫓기는 마치 미제사건의 형사와 도둑과도 같았다.

     80대 중반까지 직장 생활하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이지만 그 연세에 골프도 치러 다니고 주 1회 연습장도 나가는 건강했던 분이었다. 그러다 담배로 인한 호흡기 질환 문제로 80대 후반부터는 평생 해오던 그 2가지를 모두 다 못 하게 되었다. 연세로 봐선 극히 자연스러운 퇴장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워했을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고 헤아려드리고 좀 더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좀 더 자주 같이 여행을 다녔더라면 좀 더, 좀 더... 했었더라면 하는 후회와 아쉬움만 남는다. 아버지는 나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분인데 받은 것에 비하면 해드린 것이 너무 없다. 퇴원하면 같이 하려던 계획들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손짓하며 불렀다. 숨이 몹시 찰 텐데 무슨 말씀을 또 하려나 싶어 ”아버지, 내일 주치의 나오면 상의해서 퇴원하고 집에 가서 편하게 말씀하세요.” 하고는 아버지 힘들까 봐 말을 막았다. 그런데 다음날 또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끝내 회복 못 하고 말았다. 어떤 조치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충분한 효도를 못 한 것보다 그날의 끝내 듣지 못한 이야기가 더 안타깝고 아쉬웠다.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숨도 쉬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를 부르셨을까. 남편에게 잘해라? 아이들 잘 키워라? 잘 살아라? 고맙다? 아니면 먼저 가실 것을 미리 알고 혼자 남을 어머니를 부탁하려고 부른 것일까? 아버지는 늘 자식들한테 의지 않고 살다 갈 것이라는 뜻을 밝혔었지만 그것은 두 분이 같이 계실 경우이고 누구라도 혼자가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식들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신경 써야 한다.

      그날의 그 손짓을 나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여기고 아버지와 무언의 약속을 했다. 아버지가 끔찍하게 아끼는 어머니는 앞으로 내가 잘 보살피겠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이다. 그 이후 나는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어머니에게 달려가 식사도 같이하고 정성껏 손과 발이 되어드렸다. 코로나 이전까지는 오빠가 사는 미국에도 혼자 다녔는데 이젠 외출도 자유롭지 못하다. 어머니는 매일 마시는 간단한 우유나 바나나를 사러도 못 나가게 되었다. 겨우 혈압약 타러 보건소나 예방접종 차 병원 가는 것이 전부다. 

      요즘 들어 어머니는 외출을 거의 안 한다.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곤 한 주도 빠지지 않았던 성당미사도 TV로 대신한다. 몇 달 후면 아버지의 10주기다. 어머니의 노환이 점점 깊어 갈수록 내 마음은 더 초조해진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면 아버지가 ‘그래, 잘했다’라고 해 주실지 아니면 나무라실지. 어떤 말이라도 직접 해 주시면 이번에는 절대 가로막지 않고 잘 들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눈가가 촉촉 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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