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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HAS Jan 17. 2022

[Book Log 2022] 거꾸로 읽는 세계사

20세기는 태양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 체감하기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세계사에 관련된 책을 읽어본 기억이 없었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다른 여러 나라들의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을 때는 그 나라들은 대체 왜 지금 21세기에도 저런 일을 겪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 많은 세게 여러 나라 중에 그 나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내용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이 책을 선택한 건 무엇보다 20세기 100년간의 시간을 11가지라는 키워드로 함축해 놓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과연 11가지 중에서 몇 가지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마음이 있기도 했는데,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정말이지 학교 다닐 때는 알지 못했던 세세한 내용들을 자세히 읽어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11가지 세계 사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차 대전의 시작점이 된 사라예보 사건, 중국 공산당의 생성과정과 팔레스타인의 치열했던 삶이었다. 학교에서 시험문제를 풀기 위해 암기만 했던 내용이 아닌 어떤 이 유로 해서 사건이 발생될 수밖에 없었는지 사건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기술하고 있어 20세기 100년의 역사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세계사 축약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듯하다. 



이 책은 20세기 세계사의 열한 가지로 큰 사건을 다룬 보고서다. 심오한 역사 철학이나 역사이론은 없다. 역사의 사실, 사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정보뿐이다. 어떤 특정한 이념이나 정책을 놓고 사람마다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고 때로는 판단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니 그런 것을 신념체계로 만들어 세상을 보는 잣대로 삼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언론은 여전히 이념의 색안경을 걸치고 세상사를 보도한다.  오늘의 '지구촌'이 어떤 역사의 곡절을 품고 있는지 알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가벼운 읽을거리가 되기를 바란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서문 중





1. 드레퓌스 사건 

. 문제는 드레퓌스의 글씨가 아니라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유대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폐지했지만 천년 넘게 이어진 종교적 차별의 악습은 여전했다. 

. 다수의 시민들이 반유대주의 정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언론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공공연히 반유대주의를 선동했다. 

. 20세기는 민주주의를 문명의 대세로 만든 100년이었다. 

. 드레퓌스 사건은 '지식인과 연론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 지식인 집단은 민주주의와 과학혁명의 사물이다. 지식인이 말과 글로 여론을 움직여 권력의 향배를 좌우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 언론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못지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제4부'가 됐다. 정보유통망을 장악한 신문, 잡지, 방송 종사자도 지식인 집단의 일원이 됐다.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언론이 크게 꾸준히 보도하면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이 됐다. 지식인과 신문, 잡지, 방송의 시대는 컴퓨터를 활용한 네트워크 혁명이 일어나 20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그것은 20세기 특유의 현상이었다. 


2. 사라예보 사건

. 1920년 출간된 '제국 주의론'에서 존 홉슨은 침략적 제국주의는 제조업자와 무역업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며 세금을 낭비하고 국민을 위험에 빠뜨린다. 막대한 군비지출, 파멸적인 전쟁, 외교적 술수로 이익을 보는 것은 해외에서도 안전하게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소수 투자자뿐이다. 

. 제국주의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국민의 이익을 해치지만 원시적 종족 본능인 맹목적 애국주의를 자극해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3. 러시아 혁명 

. 소수정파 볼셰비키를 권력의 정점에 올려 세웠던 러시아 혁명의 전개 과정과 결과는 사회의 기본질서를 완전히 바꾸는 사회혁명에 관해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안겨줬다. 

첫째, 사회혁명은 구체제가 스스로 무너진 뒤에 일어났다. 구체제는 스스로 무너졌고 주인 없는 권력을 그들이 집어 들었을 뿐이다. 혁명의 적은 탄압이 아니라 개혁이다. 필요한 개혁을 제때 하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 사회혁명은 구체제보다 더 강력한 중압 집권 체제를 낳았다.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이 그랬다. 셋째, 사회혁명은 열병과 같아서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한 행위를 했다.

. 볼셰비키는 억압과 불평등이 없는 이상 사회를 향한 갈망을 품고 전제 정치와 싸웠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해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위대한 실험'은 끔찍하고 허망한 실패로 끝났다. 

이유는 첫째 공포정치였다.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이가 온전하게 자유를 누리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그런데 소련 정치체제는 개인의 자유 그 자체를 말살했다. 둘째는 경제의 비효율이었다. 

. 볼셰비키의 이상주의는 권력의 쾌락을 이겨내지 못했다. 사회혁명으로 바꿀 수 없는 생물학적 본성이 호모 사파 엔스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몰랐던 듯하다. 


4. 대공황 

. 대공황은 많은 것을 바꿨다.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손'을 믿었던 자유방임주의 경제철학을 무너뜨렸다. 시장경제는 내버려 두어야 번성하는 야생초가 아니라 세심하게 관리해야 할 온실의 화초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무너진 1990년 이후 자본주의는 '더 나은 대안이 없는' 경제체제가 됐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불황과 '승자독식'으로 흐르는 양극화 현상에서 보듯, 인간은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임의로 통제하지 못한다. 

. 대공황은 사람들이 더 많은 상품의 생산에 열광하고 물질적 부의 축적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던 시기에 세상을 덮쳤다. 인간은 자신이 요술램프에서 불러낸 거인을 다루지 못하는 소년과 같았다. 오늘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다를까?


5. 대장정

. 중국 공산당은 이민을 먹여 살렸고 봉건적 폐습을 일소했으며 제국주의의 간섭과 수탈을 뿌리쳤다. 

개인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해 사상과 이념의 다양성을 봉쇄하고 입법, 사법, 행정권을 하나로 묶어 권력을 집중했으며 권력자의 임기를 실효성 있게 제한하지도 않았다.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황제'가 됐다. 

. 마오쩌둥 사망 이후 뎡사오핑은 1978년 경제개발을 위한 개혁개방 정책을 보고하고 경제체제를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로 전환했다. 중국 경제는 중앙통제 방식의 계획경제와 분권 시장 경제를 혼합한 체제다. 

오늘날 중국 국민의 삶은 사회주의 이념이 아니라 부를 향한 열망이 지배한다.  

. 마오쩌둥은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 중국 지식인들은 대부분 서구식 '대중민주주의'를 거부하며 '신민주주의'를 중국 실정에 맞는 정치체제라고 옹호한다.  통일왕조가 무너질 때마다 혹독한 내전의 고통을 겪은 중국 민중은 적어도 당분간은 공산당의 지배를 용인할 듯하다. 


6. 히틀러

. '서른 살 이전의 히틀러는 시대상황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비어홀 폭동' 재판에 나온 서른다섯 살의 히틀러는 반대로 세상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1933년 총리직에 오른 뒤에는 역사 그 자체가 되었다. 

. 인종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 반유대주의 가부장주의 등 '모든 낡고 악한 이념의 연대'가 그에게 무한권력을 안겨줬다. 히틀러는 대중을 속이지 않았다. 연설과 책에서 자신의 사상과 목표와 방법을 명확하게 밝혔다. 독일 국민은 알면서 그를 지지했다. 필연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 또한 아니었다 그런 일을 언제 어디서든 또 벌어질 수 있다. 

. 히틀러는 민주정당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경제 상황에 대한 절망을 틈타 '새로운 민족공동체에 대한 망상'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 히틀러는 경제 분양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둠으로써 권위와 지지기반을 다졌다. 정부의 재정지출과 공공투자를 확대해  총수요를 북돋우고 고용을 창출했다. 세재혜택을 비롯한 인센티브를 주어 국가적으로 중요한 산업의 민간 투자를 자극했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단을 동원했다. 모든 일자리는 '게르만 남자'에게 줬다 

. 히틀러는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 절반을 죽였다. 유럽의 유대인은 세상에 섞일 수 없는 '천민'이었다. 담장으로 격리한 '게토'에 거주하면서 특별한 표식을 한 옷을 입어야 했다. 시민권이 없어서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기에 가정에서 아이들을 교육했고 고리대금업이나 전당포처럼 기독교가 기피하던 일을 했다. 

.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계몽사상이 퍼지자 유대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폐지하는 나라가 늘어났다. 귀족과 지주 등 전통적인 보수뿐만 아니라 소상인, 농민, 노동자들까지 해묵은 불신과 혐오감을 드러냈다. 

. 홀로코스트의 저변에는 인종주의 우생학 반유대주의 등 연관된 사상과 이론이 깔려 있었다. 유대인을 말살하고 슬라브인을 노예로 삼아 게르만족의 세계지배를 이룬다는 망상을 추구했다. 독일 보수세력과 군부 지주 대자본가들은 나치의 인종주의를 예찬했고 독일 국민은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몰랐거나 모른 체하며 히틀러를 지지했다. 나치즘은 '모든 악의 연대'였다. 

. 나치가 체현한 '모든 악'은 약해졌을 뿐 사라지지는 않았다. 파시즘은 '군사독재' 형태로 냉전시대 여러 국가에서 유행했다. 인종주의도 나치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유대니은 팔레스타인에서 '가해자'가 됐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가부장적인 사상과 문화는 20세기가 끝날 무렵에야 본격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 나치즘은 '모든 악의 연대'였다. 나치의 범조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하는 행위는 개별적인 악을 강화하고 '모든 악의 연대'를 되살릴 위험이 있다. 독일 정치지도자와 사민들이 나치, 시대의 기억을 나날이 새롭게 되새기는 까닭은 그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7. 팔레스타인

.  유대 군대의 '인종청소' : 영국군이 하이파에서 물러난 1948년 4월 21일에는 도심을 집중 폭격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아랍인에게 총을 쏘았으며 불에 타는 모든 것에 방화했다. 하이파 주민들은 물에 뜨는 것은 무엇이든 붙잡고 항구를 탈출했다. 밟혀 죽거나 버려진 아이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동유럽 점령지의 유대민을 마을 단위로 학살한 나치 친위대 못지않게 잔인했던 것이다. 

. 1948년 5월 14일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 

. 이스라엘 건국은 곧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략이었다. 시온주의는 다른 민족 집단을 폭력으로 내쫓고 자기 나라를 세운 침략적 민족주의였다 그들이 할 일은 수천 년 동안 유대인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박해하고 학살한 유럽 기독교인의 행위와 다르지 않았다. 

. 이스라엘은 아랍의 바다에 뜬 유대인의 섬이다. 

평화로운 공존을 원한다면 가해자인 이스라엘 정부와 국민들이 팔레스타인 민중을 피해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풀어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유럽에서 수천 년 동안 당했던 박해와 홀로코스트의 참극을 돌아보며 느끼는 감정을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고스란히 떠 안겼다. 그 점을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공존에 대한 합의를 얻어내지 않는 한. 유대민족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평화와 안전을 누리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8. 베트남 

. 제국주의 수탈 정책의 내용과 형식은 '만국 공통'이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같은 유럽 민주주의든 천왕제 일본이든 잔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2천 년 동안 중국의 패권에 맞섰던 베트남 민중은 프랑스를 상대로 100여 년의 민족 해방투쟁을 전개했다. 

. '벗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과 체면을 위해서' 전쟁을 벌이던 미국 정부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냉정하게 남베트남을 버렸다. 

. 베트남의 사회주의 혁명은 프랑스, 일본, 미국 군대와 싸운 백 년의 전쟁이었고 말 그대로 '상처뿐인 승리'를 거뒀다.  북베트남의 도시와 산업시설은 융단 폭격에 잿더미가 다 됐다. 밀림의 풀과 나무는 화학물질에 말라죽었고 미군 불도저가 파괴한 마을은 황무지로 남았다. 수많은 애국자가 죽었고 팔다리를 잃은 부상자와 전쟁고아가 넘쳤다. 

. '미국은 파리 평화협정에서 약속한 전쟁배상금 지급을 거부하고 베트남의 대외교역을 봉쇄했다. 전쟁이 끝나자 소련과 중국의 원조도 끊겼다. 

. 중국이 1979년 2월 30만 병력을 동원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그러나 중국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갔다. 

. 한국은 베트남 전쟁의 상처는 어디까지나 '가해자'로서 입은 것이었다. 그 문제를 덮어두고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관계를 말하는 것은 남과 자기 자신을 모두 속이는 일이다. 그런 식이라면 합리화하지 못할 죄악이란 없다.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를 가리켜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불행한 일' 이라거나 '좋은 미래를 위해 어두운 과거를 얼른 잊어버리는 게 좋다' 하는 일본 우익과 다를 바 없다. 베트남에 파병한 덕에 우리 기업이 사업기회를 잡았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산업화를 성공시켰으니 잘 된 일이라고 한다면 정당화할 수 없는 침략 전쟁은 없을 것이다. 


9. 맬컴맥스

. 맬컴은 1959년 8월 이슬람 민족이라는 단체를 통해 알려졌다.  

. '백인이 우리더러 흑인 지상주의를 가르친다고 비난한다 해서 자신들이 저질러온 백인 지상주의 범죄를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흑인의 정신과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향상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 '서부 개척 시대'는 자본주의 탐욕과 인종주의 폭력이 난무한 야만의 시간이었다. 백인은 아프리카의 주민을 납치해 노예로 부렸다. 

. 노예는 '말하는 가축'이었다. 반항할 엄두를 낼 수 없게 하려고 갖가지 형태의 잔혹한 폭행과 고문 방법을 개발했다. 병들거나 늙어 쓸모가 없어지면 굶어 죽게 방치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노예들은 조상의 고향이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몰랐다. 

.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은 흑인 노예를 부리면서 전부터 지니고 있던 인종주의를 더 강화했다. 그들이 오로지 기득권을 지키려는 탐욕 때문에 연방을 탈퇴하고 전쟁을 벌였다고 할 수는 없다. 열등한 흑인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라는 요구에 그들 나름의 '도덕적 분노'를 느꼈다.  사상의 힘은 그토록 강력하다. 

. 미국 사회는 흑인에게 '아메리칸드림'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예제를 폐지한 이후 농업 노동자나 소작인으로 남부에 살던 흑인 600만 명이 20세기 들어 도시로 이주했다. 1950년대 말에는 흑인의 80%가 도시에 살면서 미숙련 노동과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 맬컴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를 미국 인종문제의 해결책으로 여겼다. 유대인이 유럽 기독교 사회에 통합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헤르츨처럼 맬컴은 미국 사회의 흑백 통합은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분리를 주장했다. 

. 민권 운동 지도자들은 맬컴이 백인 인종주의자와 똑같은 주장을 하면서 폭력을 선동한다고 비판했다.  맬컴은 분리'는 '격리'와 다르다고 받아쳤다. '격리'는 강자가 약자에게 강제하는 것이지만, '분리'는 평등한 둘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킹 목사는 미국 정치와 사회를 크게 바꿨다. 도덕적 지도력을 발휘해 수많은 백인의 양심을 일깨웠다. 베트남 전쟁을 비판해 인기가 떨어졌지만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지켰다. 자신의 오류와 도덕적 결함을 인정했고 성인이라는 칭찬을 거절했다.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유머로 소통하면서 대중을 비폭력 운동으로 이끌었다. 인류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었다. 

. 맬컴은 흑인의 자주적 사고방식을 일깨우고 북돋운 점에서는 킹 목사를 능가했다. 미국 흑인에게 '정체성의 자각'을 가져다줬다. 

. 미국 인종문제의 책임은 '소수인종'이 아니라 '백인'에게 있다. 그들은 인종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미국을 건립했으며 인종주의적 특권 의식에 의거해 흑인 노예를 부렸다. 미국의 인종차별 제도는 없어졌지만 차별은 남아있다. 인종간 소득 불평등은 교육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교육 수준이 낮고 재산과 소득이 적고 사회적 지위가 낮으면 손쉬운 차별의 대상이 된다. 

. 꿈을 실현하고 싶은 흑인은 맬컴의 권고를 기억해야 한다. 그는 말했다. '도덕적 수준을 높이고 서로 도우며 경제적 능력을 기르자. 백인에게 생계를 의존하거나 구걸하지 말자'


10. 핵무기 

. 20세기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볼셰비키 혁명이었고 가장 중대한 '기술적 사건'은 핵무기 개발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은 지나갔다. 그러나 문명과 지구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할지도 모를 핵무기의 위협은 21세기에도 인류와 공존한다. 

.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과 정치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인류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러나 핵의 위험성을 직시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더 많은 사람이 핵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연대한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비관론자들의 예상보다 오래 생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독일 통일과 소련 해체

. 베를린 장벽 붕괴는 우연이 아니었고 독립한 사건도 아니었다. 동유럽 사회주의 세계를 무너뜨린 민주주의 혁명 가운데 하나였다. 

. 스탈린은 잔혹하고 무자비한 정치테러로 중앙통제 계획경제와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 소련은 나치 독일과 다르지 않은 사회였다. 스탈린은 '태양처럼 빛나는 지도자'가 되어 노동조합과 농민 단체를 비롯한 사회조직을 공산당의 손발로 삼았다. 문학과 예술을 공산주의와 스탈린주의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학문 사상의 자유를 말살했다. 대외 정책은 국내 정치의 연장이었다.

.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품에서 태어났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사회의 대세가 된 자본주의 체제는 눈부신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불러들였다.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 불평등의 근본 원인인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를 끝내겠다는 원대한 꿈을 꿨다. ' 

. 중앙통제 계획경제에서는 정부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공산당 간부와 경제관료들은 소비자인 인민의 욕구를 존중하지 않았다. 기업 경영들은 할당받은 생산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것만 목표로 삼았다. 인력과 비용을 절감하고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과학 기술을 활용하거나 생산 방식을 혁신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 독일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결함을 인정했다. 경제가 꾸준히 안정적으로 발전하려면 사회 정의에 대한 시민의 인식을 존중하고 서민의 생활안정을 보장해 사회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 20세기는 사회혁명과 전쟁의 시대이자 민주주의 시대였다 볼셰비키 혁명은 인류의 오랜 꿈을 실현하려는 이상주의 운동의 산물이었지만 비인간적이고 비효율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낳았으며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소멸했다. 


**에필로그 **

. 기껏해야 100년을 사는 인간에게는 '역사의 시간'도 너무나 길다. 그래서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고 집착한다. 20세기는 태양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을 체감하기에 좋은 100년이었다. 

. 시장경제 또는 자본주의가 경제체제의 표준이 됐다. 개인의 자유와 만인의 평등을 토대로 삼아 권력자를 선출하고 권력을 제한, 분산하는 민주주의가 보편적 정치체제로 자리를 굳혔다. 세계는 문화적으로 예전보다 훨씬 균질해졌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모든 것이 '헛되고 또 헛된' 일이지만 '역사의 시간'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고 믿으면서 불합리한 제도와 관념에 도전했다. 

. 20세기의 가장 큰 '혁명적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범용 디지털 컴퓨터의 발명이 지난 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시작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비교적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앨련튜링. 세계 2차 대전 때 독일군의 암호 시스템 '에그 니마'를 해독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연합군의 승리를 앞당기고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 막 시작된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 생명공학, 첨단소재, 양자 컴퓨터 등의 기술이 융합해 기존의 생산, 유통, 소통, 협력 시스템을 파괴적으로 바꾸는 기술 혁명이다. 

. 생산력 발전이 사회조직과 사상과 문화의 변화를 가져오는 동력이라는 견해는 하나의 이론으로 존재할 자격이 충분하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과학 혁명이 일으키는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다른 체제로 이행할 것이다. 

. 인류 역사에서 한 방향으로 발전한 것은 과학기술뿐이었다. 농업혁명에서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을 거쳐 컴퓨터 혁명과 4차 산업혁명까지 역사를 주동한 힘은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른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이었다. 

. 누가 21세기 문명사를 살 것인가. 20세기와 크게 다른 유형의 인물을 중심에 두고 21세기 문명사를 정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혁명가나 정치인이 아니라 과학자, 엔지니어, 기업인을 역사의 주역으로 평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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