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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섭 Dec 26. 2022

횡단보도를 지켜보며

중년 백수의 생 바라보기 6

나른한 가을 오후, 사무실에서 졸음이 밀려오던 차에 기분이나 전환하자고 근처 헬스클럽으로 나선다. 가까운 거리지만, 차를 타고 가면 어정쩡한 날씨에도 반바지와 반팔로 밖을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오 분 거리에 횡단보도가 서너 개가 버티고 있다.


얼마 전, 법이 바뀌어 우회전시 횡단보도를 만나면 잠시 세워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다. 그 소소한 법률을 지킬 요량으로 차를 세웠다. 앞에 귀여운 초등학생의 무리들이 오른손을 바짝 들고, 마치 선생님이 옆에 있는 듯 좌우를 살피며 건너가고 있었다. 어찌나 귀여운지, 순간 오리들이 제 어미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한 무리의 아이들은 “우리는 손을 들었으니, 이 길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요”라고 자동차 철제로 무장한 우리를 무언으로 겁박하듯 당당히 길을 건너간다.


그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어릴 적 친구들 과의 추억이 떠올라 상념에 잠긴다. 나에겐 동네친구라는 이름의 아이들과 한 시절을 지냈다. 계급도, 사회적 지위도 무시한 채, 그저 한 동네에 집이 있다는 이유로 골목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매일 만나고, 떠들고, 같이 꿈을 꾸었던 친구들이었다. 그리곤 세월은 흘러, 학창 시절 억압의 최고조에 달했을 고3 때, 한 친구가 상심한 듯 선언한다. “나 대학에 안 갈 거야!” 우리들 중에 가장 리더십이 뛰어난 친구의 한마디에 놀라, 그날 밤 그 친구를 설득하기 위해 모두가 진땀을 흘렸다. 지루한 설득과정에서 그의 완고함을 내려놓게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곤 우리가 내린 결론은, 대학교수 부모님을 둔 친구의 넓은 집에서 대학입시 전 삼 개월간 같이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함께 한다는 결정에 수긍한 그 친구는 우리와 마지막 청춘의 시험을 어울려 치르기로 했다. 그 삭막했던 고3의 구십 일간 서로를 다독이고, 알려주며 우리는 다른 듯 같은 꿈을 키우고 있었다. 


공부에 치중하던 어느 가을밤, 잠시 머리를 식히려 테라스 위 지붕에 올라갔다. 서늘한 지붕 위에 누워 하늘의 별을 같은 시선으로 나누었다. 그때의 낭만적 분위기는 우리들의 억압된 시간을 잠시나마 풀어주었다. 그러다 한 친구가 돌연 묻는다. “너희는 어떤 죽음에 만족할 거야?” 그때 모두의 대답은 달랐지만, 나는 순간 치기 어린 감정에 휩싸여 답했던 말을 기억한다. “만약 내 장례식에 너희들만 울어준다면, 그것으로 난 충분해”. 그 대답이 스스로에게 만족했는지, 그때 느끼었던 뿌듯함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기분 좋은 밤이었고, 우린 서로에게 충실했고, 우리의 세상이 곧 올 거란 기대감에 뜰 떠 있었다. 그 밤은 아직도 내 가슴에 어느 가을밤이 아닌, 그 가을밤으로 남아있다.


마지막 학창 시절, 감기 같은 열정에 휩싸였던 우리 입시의 결과는 대학진출 포기를 선언한 친구를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대학에 진학했다. 그 당시 대학 진학률로 보면 굉장히 확률 높은 도전이었지만, 우리는 그 한 친구의 불합격에 마음이 아려 왔다. 우리의 학창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비극도 희극도 아닌 채로.


일 년이 지나고 다시 대학입시의 시절이 왔을 때, 그 친구는 수도권 대학에 합격을 했고, 우리는 마치 우리의 대학합격을 일 년쯤 미루었다가 축하라도 하듯 서로의 품에 안기어 기뻐했다. 그날, 우린 서로의 집에서 잠 못 드는 밤을 지새웠다. 그 밤 축제의 꿈을 꾸었고, 우리 청춘의 시작을 알리는 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만큼은 우리에게 무서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횡단보도 파란불이 꺼지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다 건너간 것을 확인한 후, 차를 유모차 다루듯 천천히 움직였다. 길을 건넌 아이들은 서로 떠들며 어디론 가 손을 잡고 향하고 있었다. 그 한 무리를 보면서 나의 친구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같이 나누었던 가을밤 한 조각이, 나는 여전히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음을 알고 있다. 


오늘밤 그들에게 한 명 한 명 전화를 걸어 안녕을 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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