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정했던 부성애와 아들의 난폭적인 일탈의 팩트
✒️영조의 선택은 정말로 매정한 선택이었을까?
1.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트라우마 때문에 신하들을 향한 강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정치를 펼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더욱 영조는 자신을 이을 세자를 강하게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야만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을 영조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신하들은 늘 왕권을 흔들고 자신들의 세력 굳히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었던 시대였으니까)
2. 이런 영조의 트라우마는 강한 세자 만들기에 조선 역대 어느 왕보다 더 집착하여 훈육하고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매정할 정도로 세자를 몰아세웠던 영조의 교육에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훈육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뒤주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세자의 행동은 어떠했는가! 가히 사도세자의 행동은 연산군 못지않은 궁중 내에 묻지 마 폭행과 연쇄 살인의 세자이었다. 궁녀부터 내관, 신하까지 심지어는 생모까지 살인하려는 위협까지 말이다.
✒️아버지에 대한 스트레스를 궁중 내 신하들에게 폭행하고 연쇄적으로 살인을 한 사도세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며 뒤주 속에 죽은 사도세자의 모습을 그저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아선 안되지 않을까요?.. , 그리고 사도세자의 손에서 죽어간 신하들과 그 가족의 한이 사도세자의 뒤주 속 죽음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까요?.. , 그들은 누구에게 위로받고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을까요?
✒️왕조의 기록은 사관이 기록하고 보관하여 우리가 그 기록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다시 쓴다면 어떻게 기록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21세기 사관으로써 조선시대의 사관보다는 더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다시 한번 재조명해서 기록하고 배우고 가르쳐야 되지 않을까요?..
✒️사도세자의 뒤주 속 죽음도 애틋하게 바라보겠지만 강한 군주를 만들려는 영조의 고뇌가 담긴 훈육 그리고 사도세자의 손에 희생된 신하들의 죽음도 함께 재조명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