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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rose Sep 05. 2023

할머니에게 해방되는 날까지

가족들이 날개를 다는 날까지


사람이 부정적인 무언가에 발목 잡혀 묶이게 되면 점점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우리 가족에게는 할머니의 존재가 그러하다.

아버지의 하나뿐인 어머니이기에 이런 글이 조금 조심스럽다.

내 어머니의 인생은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로 시작해서 시어머니 병수발로 끝날 것이다.

내 아버지는 당신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기대와 원망, 실망을 온몸으로 맞음과 동시에

아내에게 수시로 미안함을 느끼며 둘 사이에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내 언니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게 되며 발이 묶였다가 조금이나마 해방된 지 얼마 안 됐다.

내 남동생은 할머니를 극도로 싫어하기에 거리를 두고 거의 소통을 하지 않는다.


나는 할머니와 가끔 맞섰다. 더 이상 엄마 욕을 하지 말라고 대들었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할머니의 반감만 커질 뿐이었다.

할머니의 말들은 도저히 봐줄 수도 들어줄 수도 없었고

소위 말하는 ‘가스라이팅’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신증 수준의 자기 연민, 피해 의식과 며느리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로 우리 가족들을 오염시켰다.

자식을 혼자서 서울대 의대에 보냈다는 자부심이 극에 달했기에

할머니 입장에선 우리 어머니의 조건이 아쉬웠을 것이다.

양가에서 결혼을 반대하셨으나 결국 자식들이 이겼다.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다른 여자에게 아들을 뺏긴다 생각하니 속상하셨겠지.

자식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내 아들을 뺏어간 괘씸한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로 해소하기 시작하셨겠지.

어머니야 그때 어렸으니 처음에는 고분고분 했겠으나

고된 시집살이를 도저히 버티기 힘들어 시어머니와 몇 번이고 부딪히거나 도망치려 하셨다.

나도 두 분이 싸우는걸 몇 번 보았고 어머니가 울며 소리 지르며 많이 힘들어하는 걸 보았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버릇없고 못 배웠다며 끝까지 경멸했던 할머니의 얼굴도 보았고


할머니는 정말 예민하고 까다롭고 이기적인 분이다.

할머니가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신 후

홀로 지내시는 할머니댁에서 밖으로 나가시지 못하는 상황이 왔고

마침내 요양 보호사를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할머니를 도저히 병수발할 수 없겠다며 고개를 저으며 도망친 사람이 숱하다.

그런 어마어마한 분을 몇 십 년 맞추며 사는 가족들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을 것.

그래도 여전히 할머니 본인 스스로는 이 인생의 엄청난 피해자며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할머니 입맛에 맞게 맞춰드리며 돌보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울고 불고 싸워도 결국엔 가족이기에 그 존재를 에라 모른 채 놓아버릴 수 없으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엔 도리가 없다.

할머니의 불안감, 가족 구성원의 긴장과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든 활용해야 했다.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결혼 후 출가하고 가족과 거리를 두게 되면서

몇 년을 제삼자 입장에서 바라보고 느낀 것이 있다.

우리 가족들이 ‘너무’ 착하다는 것

그들은 할머니만 아니면 다들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다녔겠다는 것

수년의 세월 동안 얼마나 고된 노력들을 했는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나뿐인 어머니이기에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투덜대면서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가족을 놓지 않고 보호하는 것

서로를 원망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끔찍하게 아끼는 마음

그것이 가족을 설명하는 말인걸


할머니 때문에 힘들 때를 제외하고

그들끼리 화목한 순간을 유지하고 행복을 찾으려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이면서도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할머니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기 싫어 가족과 거리를 두는 나 자신도 부끄러워진다.

저렇게 발목 잡혀 일정 테두리에 갇혀 사는데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긍정적으로 살아내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불합리한 세상의 시스템을 탓하며 사람들과 맞서기를 겁내하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그때그때 웃어넘길 재미난 컨텐츠만 골라보는 내 삶이

과연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삶인가

설령 내가 교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한다 해도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를 응원해 줄

나이 지긋한 부모님들도 저렇게 열심히 삶을 살아내고 있는데

정작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신을 차리고 오랜만에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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