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일이다. 셋이 문화전당에 와서 둘만 들여보내고 혼자 남아 있다. 엄청나게 붐비는 카페에 한 테이블을 턱 하니 차지하고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자꾸 의자 한 개만 써도 되냐고 가져가서 우리 집 식탁보다 널찍한 사인용 탁자에 달랑 의자하나를 놓고 그 위에 혼자 앉아있다. 40분 있다가 두 놈 나오면 합류해서 차 마시고 가려고 자리 맡아둔 건데.... 뭐 자리를 맡아둔댔지 의자를 맡아두겠다고는 안 했으니 아쉬운 대로 어린놈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어른 둘은 서서 먹으면 되지 않나 생각 중이다.
카페가 없었던 시절의 사람들은 한해의 마지막날 어디서 뭘 하며 보냈을까. 집구석에 모여 앉아 대추차라도 달여먹었나. 들여다볼 핸드폰도 없이 얼굴맡대고 앉아 무슨 말들을 했을까.
"넌 왜 이렇게 갈수록 살이 찌냐."
"건넛집 넷째 딸은 시집갔다던데"
"허구한 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방구석에 안 있는데 대추차는 목구멍에 들어가냐?"
뭐 대충 상상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지난주부터 유치원 겨울방학이다. 22일엔 뮤지컬 헬로카봇을 봤다. 주연배우 차탄이 시계를 찬 팔을 힘껏 치켜들며 외친다
"얘들아! 너희의 도움이 필요해!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모두 함께 손을 들고 헬로카봇을 외쳐줘."
악에 받친 아이들이 일제히 팔을 경쟁하듯 높이, 힘껏, 한껏, 최대한 치켜들고 복식호흡으로 동시에 고함을 지른다.
"헬!로! 우! 크아아아아보오오오옷!!!!!!!!."
그 광경은 뭐랄까 장엄하면서도, 유쾌하면서도 , 뭔가 애처로운 ,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동심의 원형 같은 모습이었다.
한 인간이 자라서 어른이 되고 함께 외쳐달라는 누군가의 요구에 선뜻 응해주기 어려운 나이가 되면 한데 모여 손을 번쩍 들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 악에 받친 어린이들의 모습에도 묘한 죄책감이 느껴지기 마련인가 보다.
방학의 첫날을 생애 첫 뮤지컬로 열어젖힌 후 크리스마스를 맞아 부모님들과의 식사, 키즈텍스가 붙은 터무니없는 가격의 선물 준비, 팔자에 없던 산타노릇, 어린이날도 아니지만 어린이날 같은 타 종교의 축제일에 우리 집 어린이 비위 맞추기, 아직 녹지 않은 눈덩이들의 잔해를 찾아다니며 개처럼 썰매 끌기, 그 와중에 직장 내 연말 인사이동들로 감정소모하기 등등 엄청나게 바쁜 한 주를 보냈다.
보냈는데,
아직도 방학이 끝나지 않았다.
어제는 한계가 있는 외동의 텐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사촌들을 초대해서 아이 셋을 데리고 키즈파크에 다녀온 여파로 오늘 하루가 현실인지 꿈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내일이면 새해다. 생계를 위한 일과 생존을 위한 일 시이에서 하루하루 넘기기에 급급했는데 돌아보니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아이를 돌보는 하루는 쉽지 않은데 합쳐놓은 일 년은 쉽게 가서 벌써 유치원에서의 첫 일 년이 지나갔다. 내년이면 형님반이 된다는 아이와 집에서는 형님 될 일이 없는 아이의 양립불가능한 역할극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으로 새해를 맞는 중이다. 니가 형님반이 된다 한들 내 형님도 아니고 , 손이 많이 가기로는 올해와 내년이 별반 다를 바도 없을 텐데 나는 또 올 한 해를 어떤 인내와 다짐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인가.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