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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ug 05. 2024

이자벨랑구 할머니의 해피해피 에이징

3년의 원정육아를 마치다

2021년 7월 27일 내 생애 두 번째 손주이며 첫 손녀딸인 나은이가 태어났다. 첫 손주인 서안이 와 두 살 터울 나은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슈인 아가였다. 나의 육아 인생에 첫 딸아이였기 때문이다.

첫 손녀 나은이

86년, 87년 생 두 아들을 키우고 02년생 조카(역시 남아)를 키우고 첫 손주 서안이 또한 사내아이였기에 손녀딸인 나은이의 탄생은 유니콘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경이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벌써 3년 전 이야기다. 공무원인 아들과 초등학교 교사인 며느리와 첫 손주 서안이는 세종에 살고 있어서 분당에 살고 있었던 우리와는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첫 손주 서안이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남편은 이때다 싶었는지 둘째 손주가 태어나는 것을 계기로 아예 집을 세종으로 옮겨 손주 육아를 돕고 그 김에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것이 어떻냐고 슬쩍 물었다.


남편의 회사는 판교에 있어서  출퇴근에만 3시간이 넘게 걸린다. 하지만 다행히 대표라 일정을 조정하면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만 출근해도 된다는 것이 이사 결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당시는 코로나 기간 중이라 재택근무가 대부분이었기에 더욱 이사 결정이 쉬웠다.  


 분당에는 노환을 앓고 계시는 친정엄마도 계시고, 친구들도 있고 다니던 교회도 있지만 보고 싶으면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이니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전보다 자주 만나지 못하고 교회도 자주 가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남해에서 한 달 살기, 제주에서 한 달 살기, 동남아지역에서 한 달 살기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들 며느리와 손주들을 보면서 낯선 곳에서 살아보는 것도 즐겁고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몽골몽골 해졌다.  

두 녀석의 육아를 돕기 위해 세종시로 이사를 갔다


다만 육아 기간은 3년으로 못을 박았다. 아무리 부자지간, 모자지간이 가깝고 친해도 또한 며느리와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서로를 존중해도 3년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이 컸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이사까지 감행하며 나선 원정육아가 오히려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원망과 미움만 쌓는 계기가 된다면 안 가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손주들의 육아를 위해 자녀들 가까이로 옮기거나 합가하고 오히려 자녀들과의 관계가 나빠져 후회한다는 조부모들의 경우를 적지 않게 들었다.  내 속에서 낳은 내 자식도 내 맘과 같지 않은데 며느리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환경과 경험이 다른 사람이 만나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것은 위험한 외줄 타기와 다르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쌓이는 몇 가지 지혜 중 하나가 가까울수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아쉽다 싶을 때 그때. 우리 생각에는 3년이 헤어지기 딱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3년 이든 2년이든 가릴 것 없이 육아로 인한 걱정이 가득했던 아들 내외는 불감청인들 고소원이라 두 손들어 환영했고 남편과 나는 나은이의 출생일에 맞추어 이사를 했다.


손주들의 육아를 위해 20년 가깝게 살았던 분당에서의 생활을 접고 세종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2021년은 한창 세종의 집값이 높을 때였지만 높은 집값 때문에 이사를 머뭇거릴 수 없었다. 곧 태어날 손녀딸이 집값보다 더 귀하고 대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3년 지난 지금은 구입 때보다 3억은 내려갔다.(흑흑)


막상 세종에 내려와 보니 의외로 좋은 점이 많았다. 물론 두 손주들을 키우며 때때로 부족한 잠, 끝없는 일거리, 노동 끝에 오는 극심한 근육통에 시달릴 때도 있었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사랑이 매일매일 나의 삶을 가득 채우곤 했다.

어린이 집에 다니면 다 키운거죠

요즘 어린이 집에서 돌아와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할 때면 어느새 저렇게 자랐나 싶어 아쉽기도 하다. 품 안에 안고 젖병을 물려주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랄까....ㅎㅎ  


나은이 백일을 지내 놓고는 몇 년 간 잊고 있었던 수영을 다시 시작했고 코로나 직전에 배우다가 코로나 때문에 접고 있었던 해금도 다시 시작했다. 주말이면 세종시 근처 맛집을 찾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고 인근 고복저수지, 동학사나 갑사, 금강휴양림, 서산이나 전주 등등 한 시간 정도 할애하면 자연 속에 파묻히거나 여가를 즐기는 일들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분당에서는 주말이든 언제든 나가기만 하면 교통체증에 식당이든 어디는 웨이팅이 다반사라 계획하고 나갔다가도 중간에 돌아오기 일쑤였다.


세종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도시다. 공무원들이 청사로 대거 출근하는 아침 시간대가 아니라면 어디든 차 막힘이 없고 심지어 거리에 지나는 사라들도 그리 많지 않다. 드문 드문 차가 다니고  한 두 사람 거리를 걷는 분위기다 보니 바쁘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는 차들도 없고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다가 어깨빵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냥 조용하고 느리게 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20년 전 분당에 처음 이사 갔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그런 한적함을 분당에서 기대할 수 없지만 말이다.


지난 3년간 손주들은 무럭무럭 자라 서안이는 우리 나이로 6살. 나은이는 4살이 되었다. 나은이가 어린이 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는  육아도 한 결 여유로워져서 오후 5시경인 하원시간까지는 내 나름대로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아이들이 아프면 밤낮없이 비상이다. 출근한 며느리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고 종일 곁에서 지켜보며 애가 닳는다. 보통 한 녀석이 아프기 시작하면 다른 녀석도 금방 전염되니 갑자기 아기 환자가 둘이 되는 일은 흔하다. 그럴 때면 남편과 둘이 비상근무에 돌입했다.


나은이 출산 후 산후 조리원에서 나온 며느리를 산후조리라는 명목으로  2달간 돌봐줬다. 첫 손주 때는 조리원에서 나 온 후 한 달 돌봐주고 분당으로 올라왔지만 둘째 때는 이사도 왔으니 한 달을 더 돌봐주기로 다. 산후조리는 미역국부터 시작이지만 가장 애를 쓴 건 산모의 건강 회복을 위해 아기를 내가 데리고 자거나 밤중 수유를 내가 맡아서 하는 건데 아무리 예쁘고 귀한 손주라도 몰려오는 잠을 참기는 쉽지 않았다.


밤에는 꾸벅꾸벅 졸면서 젖병을 물리고  낮에는 큰 손주랑 놀아주며 간식 포함 1일 5식 산모 먹거리에 빈틈없이 신경을 써 줘야 한다. 모유는 잘 나오는지, 어디 몸이 뭉치고 아픈 구석은 없는지,  산후통이나 후유증을 없는지, 우울하지는 않은지 산후조리원처럼은 아니라도 시엄마조리원에서도 최대한의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육아와 산후조리는 언제나 고단해도 신비롭고 즐거운 일이다. 며느리는 나의 노력을 고맙게 받았고 특별히 유난을 떨거나 까다롭게 하지 않았다. 서로 최대한 마음을 다치치 않게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 노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편하지만 늘 서로를 배려해야 하는 관계가 바로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이니 말이다.


아들이 매달 주는 용돈 외에 손주들 육아에 대한 비용은 받지 않는다. 며느리가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하면서 수입이 생기자 작게 성의 표시를 하고 아들이 식비 부담조로 약간의 비용을 더 보내고 있지만 주변에 손주 육아를 담당하고 수고비를 받아서 생활비에 보탠다는 조부모들에 비해보면 어림도 없는 금액이다. (그럼에도 불구 엄청 고맙지만)


감사하게도 59년생 베이비부머인 남편은 작은 사업체를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그런 덕에 아이들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정도의 여유가 있다. 대부분의 장보기는 우리가 하고 있고 외식을 하는 경우에도 남편이 사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부분에 대한 불만은 없다. 아직은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어서 행복하다.  가끔 아들이 밥을 사주면 더 맛있고 고맙 기는 하다. ㅎㅎ

아쉽고도 기뻤던 나은이 3살 생일

지난 7월 27일 나은이가 36개월 생일을 맞았다. 야호!! 이제 약속한 3년이 지났다. 너무나 행복했고 기뻤고 반짝였던 지난 3년. 지내놓고 나니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매일매일이 소중하고 아쉽기만 하다. 아무리 소중하고 귀해도 약속은 약속. 우리는 이제 이사를 준비한다.


 우리의 육아지원이 마무리되는 시기에 맞추어 아들도 세종을 떠난다.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아 미국에서 3년 동안 근무를 하고 돌아 올 예정이다. 엄마의 원정육가 기간 중 석사를 마쳤고 3년 마무리와 함께 해외 근무가 결정되었으니 부모육아가 좋은 결실을 맺은 것 같아  엄마로서 뿌듯하기도 하다.


아들은 8월 중순에 먼저 출국하고 며느리와 두 손주는 9월 초에 우리 부부가 같이 데리고 들어가기로 했다. 남편은 인도네시아 출장 전인 10월 초에, 나는 한 달 더 머물다 11월 초에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아들며느리는 비싼 항공료가 아까우니 방문비자 3개월을 다 채우고 가라지만 너무 추워지기 전에 판교로 이사를 해야 하기에 한 달을 앞당겨 오기로 한 것이다. 


남편 사무실에서 가까운 판교에 아파트를 알아보니 전세보증금이 세종의 집을 팔아도 모자랄 정도로 비싸다. 그래도 세종집은 팔지 않기로 했다. 돌아 올 곳을 남기고 가기로 했다. 4년 후면 남편이 70이 된다. 70까지는 열심히 일하고 그 후로는 다른 경영자를 들이거나 후계를 키워 느긋하게 뒤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바람인데 그때가 되면 다시 세종에 내려와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려고 한다. 


우리의 내일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리 하고 싶은 바람이며 그 방향으로 돛을 달고 바람에 길을 맡길 뿐이다.


 지난 60여 년의 삶 속에도 예상치 않던 바람과 풍랑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파산하지 않고 전복되지 않고 기특하게 여기까지 떠 왔다. 그리고 또 앞으로도 그리 갈 것이다. 다만 나이가 들고 보니 그렇더라. 젊은 시절 우리를 흔들었던 파도가 우리를 단련시킨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파도와 친해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무엇도 그리 두렵고 겁나않는다는 것이다.


해안선에는 파도가 치지만 먼바다는 언제나 잔잔한 것처럼 이제는 먼바다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늙는다는 것이 마냥 슬프거나 나쁘지 만은 않은 이유다.  오늘도 하루 늙었다. 오늘도 하루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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