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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ug 07. 2024

백발 마녀와 작별한 결심

고잉그레이는 개 뿔

40대 중반부터 올라오기 시작한 새치머리  올라오더니 50대 중반부터는 반백에 가까워졌다. 흰머리는 유전인지 돌아가신 아버지도 30대 중반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부모님 앞에 흰머리를 보이는 것은 불효라며 검은 염색을 하시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야 자연스러운 백발로 지내셨다. 아버지는 로맨스그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게 멋진 흰머리를 자랑하셨지만 아버지와는 다르게 나는 영 아버지 같은 멋있는 그레이가 되지 않았다.

로맨스그레이가 잘 어울리시던 아버지

지저분하고 없어 보이는 흰머리 탓에 50대부터는 매 달 한 번씩 미용실에 들러 염색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비용은 물론이거니와 할 때마다 눈이 맵고 두피가 따가운 부작용에 시달렸다. 그래도 지저분한 흰머리보다는 깔끔해 보이는 것이 좋아 참고 참아왔는데 언제부터인지 두피염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극심한 염증이 목아래로 까지 퍼지며 탈모마저 진행되어 염색 중단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그러던 중에 ‘고잉그레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한창 방송에 등장하던 강경화 외교부장관의 자연스러운 흰머리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강경화 장관의 흰머리가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자연스러운 흰머리가 아름답다는 고잉그레이의 열풍이 불었다. 완전한 백발도 아닌 반백정도의 흰머리가 아름답다는 것은 전에는 없던 미의 기준이었다. 흰머리 염색을 하지 않는 경우는 그만큼 자기 관리에 게으르거나 미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외할머니도 70대까지는 양귀비라는 염색약으로 염색을 한 검은 머리를 정갈하게 땋고 비녀를 꽂은 쪽머리를 하고 계셨다. 커다란 검은 보자기를 쓰고 거울 앞에 앉아 칫솔로 머리 염색을 하시던 할머니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염색을 하지 않은 흰머리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7~8년 정도뿐이었기에 나이가 들어도 염색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을 듯하다.   

고잉그레이 시절

피부염 때문에라도 강경화 장관의 지적이고 아름다운 고잉그레이를 따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염색으로 물들인 머리가 다 자라 없어지기까지는 열 달을 버텨야 했다. 중간에 얼마나 지저분하고 보기 싫은지 다시 염색을 해 버릴까 하는 유혹이 수도 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아름다운 고잉그레이 성공자들의 머리를 상상하며 참고 또 참았다. 염색을 할 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이 흰머리로 지내기 시작하니 관심을 보이며 묻는다. “왜 염색을 하지 않으세요?”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다는 상대편의 의사가 질문 속에 보인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검은 머리, 갈색머리, 금발머리, 빨강머리에 대해서는 왜 그러냐고 묻지 않는 사람들이 염색을 하지 않은 흰머리에 대해서는 궁금해하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만큼 우리 주변에 흰머리로 사는 중장년층이 적다는 방증이다. 어쩌면 흰머리로 사는 사람들이 뭔가 고집 있고 소신 있고 용기 있어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자연히 늘어가는 흰머리를 그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못하다니 참 아이러니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얼마간 반백으로 자연스러웠던 내 머리는 둘째 아들의 결혼식을 앞두고 다시 염색 머리로 돌아갔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나의 반백발이 생각했던 것만큼 아름답거나 지적으로 보이지도 않았을뿐더러 아들 결혼식을 앞두고 혼주 한복을 입고 보니 완전 할머니처럼 보이더라는 것이다. 인륜지대사인 아들 결혼식에서 검은 머리인 사돈이나 남편에 비해 현저히 늙은 백발마녀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고잉그레이는 개뿔~ 그만큼 참았으면 많이 참았고  반백발로도 얼마간 살아보았으니 당분간은 염색을 하고 70세가 넘어가 염색이 귀찮아지면 다시 백발로 지내볼 생각이다.

인도 여행 중 만난 멘디를 한 소녀

지금은 천연염료라는 ‘헤나'를 이용해 염색을 한다. 인도 여행 중 헤나로 ‘멘디’라는 아름다운 문신을 한 소녀와 여성들을 만난 적이 있어서 헤나가 낯설지는 않지만 머리 염색제로는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우선 ‘100% 천연염료’라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의심을 알았는지 친구가 자신이 사용하는 거라며 100% 천연 오가닉 헤나 가루를 덜어다 주었다. 친구가 추천한 헤나는 다행히 나에게 잘 맞았다. 헤나는 인도나 네팔 등지에서 나는 관목식물의 잎과 줄기를 말린 가루라고 하는데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원리와 같지만 천연재료 염색으로 자연스럽고 예쁜 갈색 머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그리 쉽지 않다.


헤나염색 과정은 비단에 쪽물 들이는 만큼의 정성이 필요하다. 헤나라는 오렌지색을 내는 염료를 물에 개어 3시간 이상 발효시킨 후 젖은 머리에 바르고 3시간 후에 샴푸 없이 물로 헹구어 낸다. 다시 인디고라는 청색을 염료를 물에 개어 바르고 40분 후에 헹구는 과정이다. 염색에 매달려 하루를 다 써야 하지만 마지막 인디고 염료를 씻어내고 머리를 말리고 나면 그토록 바라던 자연스러운 흑갈색 머리를 가질 수 있다. 화학 염료로 인한 눈 따가움이나 두피염 대신 노동에 의한 근육통이 온몸을 괴롭혀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견딜만하다. 뭐든 노력 없는 보상은 없는 법이니까.

천연 염색약으로 사용하는 헤나와 인디고

값싸지도 않고 편리하지도 않지만 헤나 역시 내 몸을 살리는 자연주의 미용의 하나라 생각된다. 백발이 불편하지 않을 나이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쭉 헤나와 함께 할 것 같다.  기왕이면 곱게 늙자. 몸도 마음도 곱게 늙기 위해서는 적잖은 노력과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오늘 하루도 곱게 늙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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