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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ug 12. 2024

이자벨랑구의 전설

잊어버리기 대장 할머니의 별명

나는 어린 시절부터 뭐든 잃어버리길 잘해서 엄마에게 잔소리를 꽤나 듣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물건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중 가장 많이 잃어버린 것이 우산인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비가 와도 우산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산을 잃어버릴까 걱정하기보다는 비를 맞는 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발이 달린 것으로 의심되는 물건들

나이를 먹다 보면 자연히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60대가 넘어가면서는 하루 한번 이상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일상이다.  자동차키, 휴대폰, TV리모컨 같은 것들에게는 발이 달려 있거나 숨기 기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외출하기 바로 전 자동차키와의 숨바꼭질은 필수코스다. 가방마다 주머니마다 서랍마다 옮겨 다니는 녀석들의 숨는 수법이 A.I처점점 진화하고 있다.


건조기에서 꺼낸 양말은 언제나 한 짝이 사라져 버리고 반찬통 뚜껑도 어딜 갔는지 늘 안 보인다. 더욱 신기한 것은 뚜껑 무덤에는 짝 잃은 뚜껑들이 또 가득하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사라진 양말 한 짝과 반찬통과 뚜껑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기들도 나머지 한쪽이 심히 그립긴 하려나. 한때는 잃어버린 양말 한쪽을 찾거나 사라진 반찬통 뚜껑을 찾다가 머리 뚜껑이 열릴 만큼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약통에 남아 있는 약들을 확인하는 순간 더 이상 그런 일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고혈압과 갱년기 증상이 있는 나는 주기적으로 병원을 방문 석 달 치씩 약을 받아 온다. 매일매일 빼놓지 않고 복용해야 하는 약이고 아침에 일어나면 약부터 먹고 일상을 시작하는 것이 루틴이다. 아니 루틴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며칠치 약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란말인가. 몇 년 지난 지금은 약이 점점 늘어서 다시 석 달 치가 되려고 한다. 약이 나 몰래 새끼를 낳는 것도 아닐진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짝 잃은 반찬통 뚜껑 무덤

상황이 이 정도 되니 반찬통 뚜껑이나 양말 한 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저 오늘 하루 실수 없이 사고 없이 잘 살아내면 박수 칠 일이다. 같이 늙어가는 꼼꼼하고 계획적인 남편도 요즘 들어 자주 잊고 실수를 한다. 처음에는 서로의 실수를 하나씩 짚어가며 비난했지만 이제는 그저 웃는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더 큰 실수 안 하길 얼마나 다행이야',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이까짓 거 별거 아니야'… 이렇게 서로를 위로하기로 했다. 앞으로 더 하면 더 했지 예전처럼 똑똑해질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우린 모두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아들들도 며느리도 나의 실수를 꼬집지 않는다. 나이 들어서 그런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눈치고 오히려 자신들도 그럴 때가 있다며 별것 아닌 듯 넘겨주곤 한다.

할머니를에게 이자벨랑구라는 별명을 지어 준 손주들

그런데 '두둥~" 손주들은 달랐다. 4살 6살 손주들 눈에 할머니는 이상한 잃어버리기 대장이다.


어린이집 등원을 하는데  날이다. 아침 먹이고 치카시 키고 옷 갈아입히고 예쁘게 머리도 묵고 신나게 집을 나서서 절반쯤 왔는데 갑자기 손자가 묻는다.


“할머니 나은이랑 내 가방은?”

“거기 그거 가방 아니니?

“아니 이건 엄마가 할머니 가져가라는 물휴진데”

“할머니 또 잊어버렸네. 맨날 잊어버리네"

“뜨아~~~”


물휴지가 뭐 소중하다고 그건 살뜰히 챙겨 오면서 어린이집 가방을 두고 오나. 울 엄마 말처럼 애는 낳서 버리고 태만 끼고 왔네.  며늘아 부탁인데 나에게 두 가지 미션을 주지 마라.


매주 한 번은 어린이집에서 하원시켜 수영장에 데리고 가야 한다. 수영하기 전 배가 고플 수 있어서 간식이랑 음료나 물 등을 챙겨가곤 하는데 간식이 너무 중요한 나머지 수영복을 안 가져가는 날도 적지 않다. 그럴 때면 두 녀석이 또 나를 놀린다. “할머니는 자꾸 잊어버리니까 이자벨랑구야. 이자벨랑구~ 이자벨랑구~ 레꼴레리 꼴레꼴레리"  


등원 시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 앞까지 들어가려면 양말을 신어야 하는데 왜 그리 양말 챙기는 것을 잊어버리는지. 양말이 없어 당황하며 아이들을 입구에 세워 놓고 선생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여러 번. 하도 잊어버려서 이제는 차에 양말을 몇 개 넣어 두었다. 어디 이뿐이랴. 수많은 실수와 실수가 반복되어 드디어 이자벨랑구가 된 것이다.  


이런 나의 실수에 며느리는 오히려 고생하셨겠다, 당황하셨겠다 위로를 전하지만 손주들은 재미있고 즐겁기만 하다. 손주들이 즐겁다니 나도 즐겁다.


“이자벨랑구 할머니래요. 이자벨랑구 할머니래요. 얼레꼴레리 꼴레꼴레리


궁상각치우 오음절의 민족답게 이자벨도 이자벨라도 아닌 이자벨랑구라니. 얼레꼴레리, 꼴레꼴레리와 같이 사용하면 얼마나 박자감 있고 운율 있는 별칭인지 모른다.  며느리는 놀리는 말이라고 쓰지 못하게 하지만 이 전통적인 운율이 어찌나 중독성 있게 입에 붙는지 금지가 어렵다.


손주들이 처음으로 만들어 낸 재미있는 별명이 나는 좋다. 그 별명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이자벨랑구로 살기로 했다. 나는야 행복한 이자벨랑구 할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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