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서 그녀가 말했다. 요즘 들어 남편이 자꾸만 언니처럼 느껴졌다고. 그래서 남편을 ‘언니’라고 부른다고 했다. 남편과 같이 살림하고, 요리하고, 맛집 찾아다니고, 그림 그리고, 꽃 가꾸는 일상이 너무나 평온해서 언니라고 불러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이 들면서 좋은 자매가 생긴 것 같아 행복하다고 했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사 남매의 맏이인 나는 고모나 이모에 비해 언니라는 호칭에 익숙하지 않다. 불러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입에 익지 않아서였을 것 같다. 하지만 여중고를 다니다 보니 언니라는 호칭도 그럭저럭 사용하게 되었다. 다만 언니라는 호칭 그리 다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다정한 언니를 경험하지 못했던 때문이지 싶다.
오빠도 익숙지 않다. ‘오빠'라고 부르면 어쩐지 내 마음 저 아래에서 뭔가 간지러운 것이 올라온다. 오빠라고 부름과 동시에 뭔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되어주어야 할 것만 같은데 귀엽고 깜찍한 여동생이 되고 주고 싶은 오빠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 일지 모른다.
내가 결혼 한 1980년대 중반쯤에는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에서 만났다면 오빠보다는 ‘형’이라고 호칭했을 것이고 사회에서 만났다면 이름 뒤에 ‘씨’를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연인관계로 발전하면 ‘자기'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내가 아닌 타인을 ‘나’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인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짐작건대 드라마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드라마에서 연인들끼리 부르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따라 했었을 것이다. 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테다.
어느 날부터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여보’라는 호칭을 쓰고 있지만 결혼 초만 해도 ‘여보’, ‘당신’은 진부하게 느껴졌다. 나의 부모가 서로를 그렇게 불렀는데 두 분은 그렇게 부르며 그리도 싸우고 갈등했다. 그런 부모의 관계를 보고 자란 탓인지 ‘여보'라는 호칭에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생기면서 타인으로부터 아무개 아빠와 엄마로 불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전까지만 해도 이름을 부르던 부모님이 나와 남편을 ‘애미야~’, ‘애비야~’로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그렇게 부모가 되었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는 남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이름보다는 누구 엄마로 소개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부부가 서로를 부를 때도 누구 엄마, 누구 아빠로 불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60이 넘어 손주가 생기니 할머니 할아버지로 부른다. 손주들과 함께 외출할 때 나도 남편을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남편도 나를 ‘할미야~’라고 부르는데 어쩐지 한 점의 어색함도 없이 호칭에 녹아든다. 마치 원래부터 할아버지, 할미였던 사람처럼 말이다.
좋은 자매가 있다는건 축복이다
남편을 언니라고 부르는 그녀는 60대 중반임에도 여전히 여성여성한 느낌을 주지만 더 이상 남편에게 남성성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부부의 속내까지 들어보지 않아 짐작할 뿐이지만 언듯 언 듯 비치는 말속에 남편이 계속 언니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이 들면서 형제들보다는 자매들이 서로 잘 지내는 것을 흔히 본다. 자매들은 나이를 먹어도 만나서 밥 먹고 수다 떨고 여행도 다니고 하지만 형제들끼리 만나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쉽지 않다. 여성들만의 공감능력과 애틋한 배려가 작용하는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언니가 되어가는 남편은 함께 늙어가기 좋은 최고의 파트너가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어릴 적 부르던 호칭 ‘형'을 변함없이 사용하는 부부도 있다. 가족애나 부부애보다는 진한 형제애나 의리가 느껴지는 부부다. 다만 갱년기를 넘기며 귀여운 남동생 같았던 아내는 오히려 큰 형님이 되고 듬직한 형이었던 남편은 자주 눈물을 흘린단다. 아내는 가끔 눈물 흘리는 형의 등을 두드려주며 위로한다고 했다. 그럴 때면 우는 아들을 달래는 엄마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인정받고 사랑받았던 시기는 언제인지 생각해 본다. 연애할 때? 신혼 초? 아마도 생물학적으로 호르몬의 분비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는 워낙 왕성한 호르몬 작용으로 인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불꽃이 튀곤 했다. 나 역시 왕성한 호르몬 작용의 노예였던 시절이었고 그로 인해 연년생 두 아들을 얻은 후 남편에게 정관 수술을 권했다. 그렇게 호르몬에게 휘둘리다가는 평생 출산과 육아에만 매달리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컸다.
호르몬의 폭발 시기는 길지 않았고 이후 남편과 나는 서로의 영역에서 열심히 살았다. 40년을 살다 보니 경제공동체이며 육아공동체이고 숱한 어려움을 함께 이겨 온 전우이자 서로를 가장 잘 아는 동반자가 되어 살고 있다. 처음엔 두 몸이 한 몸 되는 연인이었지만 이제는 몸보다는 마음이 하나 되는 친구, 형제, 자매, 가족, 동지, 전우, 동업자, 반려자 등등 각자 특성에 맞는 이런저런 모양의 짝으로 남은 생을 함께한다. 참 다행인 것은 연인이었을 그때보다 조금 덜 뜨거운 지금 훨씬 덜 싸운다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래서 좋은 것 같다. 친구든 형제든 자매든 전우든 동업자든 서로에게 그 무엇이든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짝으로 서로의 늙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측은하고 안쓰럽고 매일매일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드니말이다.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러니 여보, 내 가장 친한 친구이며 나의 동지 나의 전우 나의 가장 놀기 좋은 파트너이자 나의 편집장 나의 코치 그리고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주는 나의 연로한(?) 연인이여. 이렇게 사는 것도 인연이니 기왕 함께 사는 거 오래오래 같이 놀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