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온 지 나흘째. 처음 맞는 일요일이다. 여전히 시차적응 어려움으로 피곤하긴 했지만 손주들과 집에 있기는 너무나 좋은 날씨라 근처 공원에 가기로 했다. 벨뷔에서는 규모가 제법 크고 아이들이 물놀이나 자전거 타기 좋은 공원이라 이웃들도 많이 찾는 곳이란다.
시애틀도 사계절이 있지만 여름 기온은 한국보다는 덥지 않고 겨울은 한국보다 포근한 편이다. 하지만 9월 이후 가을 겨울 동안에는 비 오는 날이 많아 햇빛이 좋은 날은 무조건 공원에 나와 노는 것을 추천한다. 지금은 여름이 가고 있는 시점이라 바깥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공원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적지 않았다.
젊은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같이 놀아 주는 것은 한국의 부모들과 다르지 않다. 다만 아이들 놀이에 직접 관여하고 안전을 위해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기보다는 넘어지거나 위험해 보이는 상황이 발생해도 조금 시간을 가지고 스스로 해결하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한국 부모(조부모)와 다르다면 다른 모습 같았다.
손자 손녀와 노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하지만 엄청난 체력이 요구된다. 나는 미국 부모와 달리 자전거 타기를 돕기 위해 옆에서 같이 달려주고 미끄럼틀이나 그네, 회전 놀이기구를 탈 때도 같이 오르내리는 편이다.
혼자 놀게 두는 것이 안전하지 않아 보여서 가까운 거리에서 도움을 주려는 이유도 있지만 손주들도 할머니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해서 친구가 되어준다. 문제는 녀석들과는 달리 금방 체력이 소진되어 벤치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체력이 방전되어 벤치에 널브러진 나 내신 아들과 며느리가 아이들을 보는 동안 남편에게 차에 두고 온 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과자랑 간식 그리고 물을 챙겨 왔는데 그만 물을 차에 두고 내린 것이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 주차를 했기에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남편이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무슨 일일까? 차를 찾지 못했나?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멀리 남편이 허겁지겁 달려온다.
“애비는 어디 있나? 전화를 안 받네"
남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차 문이 잠겨서 열리지 않는 건가? 차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왜 저렇게 당황한 거지?
남편은 가져온 물을 나에게 던지 듯 넘겨주고 아들을 찾아서 황급히 주차장으로 가버렸다.
박살 난 유리가 뒷좌석에 가득
“무슨 일이니? 차가 고장 난 건가? 애비한테 들은 말 있니?”
“아뇨, 저도 모르겠어요. 근데 우리 자리에 홈리스 같은 남자들이 기웃거려서 다른 자리로 옮겼어요. 아무래도 애들도 있고 불편해서 안 되겠더라고요.”
아이들과 놀다 보니 남편과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왔다.
“이제 집에 가자. 그런데 차에 조심해서 타야 해. 유리창이 깨졌어. 도둑이 뒷좌석 창을 깨고 차 안에 있던 가방을 훔쳐갔어. 이 차는 사고 접수하고 다른 차로 집에 가려고 했는데 다른 차 구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니 그냥 가야겠네. 깨진 유리는 어느 정도 치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타요. 애들은 3열에 태우고”
뭐라고? 도둑이라고? 너무나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벌건 대낮에 사람도 많은 공원 주차장에서 도둑이라니. 그것도 유리창을 깨고 물건을 훔쳐가다니 이게 진정 미국인 건가?
우리가 타고 간 차는 며칠간 렌트한 차였고 보험도 들어있어서 깨진 유리창에 대한 손해는 없었다. 가방도 낡은 것이고 입던 옷가지들이랑 종이쪼가리 정도가 들어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지만 놀란 가슴은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뒷창 유리를 깨고 가방을 훔쳐갔다
미국에서는 가방을 절대 차에 두고 내리면 안 된다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유럽에서야 도둑이 많아서 여행객들의 가방이나 소지품에 대한 주의를 늘 당부하지만 여기는 세계 경찰을 자부하는 나라 미국이 아니던가.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처럼 가방을 차에 보이게 두고 내리는 행동은 무조건 가져가라는 신호란다. 미국인들은 오히려 차에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는 의미로 트렁크 문을 열어 두고 가기까지 한단다. 안에 들은 물건을 훔쳐가려고 차 유리창을 깨는 것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한 방법이란다.
한국에서는 장을 보다가 양손이 무거우면 차에 두고 다시 가서 장을 마저 보기도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단다. 짐을 차에 두고 가려면 누군가는 차에 타고 있던지 사람이 없는 차에 물건만 실어 두는 것은 그냥 가져가라는 것과 다름없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처참한 차량 도둑 현장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본 영상이 기억난다. 미국인인지 유럽인지 아무튼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카페나 도서관 같은 곳에 휴대폰이나 가방 등 소지품을 두고 자리를 비워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놀라워했던 장면이다. 영상에 달린 댓글들도 남의 물건을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 일색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