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의 탁상달력 원정기

by 소금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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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바쁘게 쫓아다녔던 수업들이 끝나서 느긋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젠 아침에 눈을 떠도 가야할 곳이 없다. 다만 가고 싶은 곳을 찾아다니는 일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매일 나가야 할 구실을 만든다. 집순이를 집 밖으로 내몰려면 별도리가 없다.

오늘은 탁상달력을 받으러 가보기로 한다. 은행에 전화를 걸어서 탁상달력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을 했다. “지금 가면 탁상달력 받을 수 있나요?” “회원이세요?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얼른 오셔야 해요.” 전화를 끊고 차편을 검색해본다. 차편이라고 해봐야 버스를 타고 가든지 걸어가는 방법뿐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 10분, 버스는 30분, 걸어서는 한 시간이다. 버스는 배차시간이 길어서 시간을 맞추려면 번거로우니 운동 삼아서 걸어가 보기로 한다.

우리 집은 면 단위이고 다리 밑을 통과하면 동 단위가 되는 신기한 행정구역, 다리 건너는 한창 개발이 진행 중인 신도시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수변공원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솜이불처럼 하얗게 눈이 쌓였던 논들이 제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하늘을 쳐다보고, 메타세콰이어도 바라보고 윤슬이 빛나는 개천도 구경한다. 반짝이는 물결이 마치 금빛 실타래처럼 눈이 부셨다. 오늘 오리는 안 보이네. 며칠 전까지는 물 위를 떠다니던 모습이 참 평화로웠는데. 순간, 오리가 철새인가, 텃새인가 더듬어본다. 자연 속에서의 익숙함이 문득 낯설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바라보는 풍경을 허투루 볼 수 없다는 마음인지 내 눈은 끝없이 이리저리로 향한다. ‘이 나무는 좀작살나무지. 이 나무 이름은 뭐였더라?’ 개천은 요즘 수변정비공사로 제법 말끔해져 있었다. 정신이 나간 며느리 머리카락처럼 흩날리던 갈대도 보이지 않고 하천 주변으로 제 왕국인 듯 우후죽순 경쟁을 벌이던 풀이며 식물들도 멀끔하게 베어져 버렸다. 계절만 스산한 것이 아니라 이곳도 개발의 물결을 타고 인위적으로 바뀌고 있어서 허허롭다.

드문드문 걷는 사람이 보이긴 하지만 한가로운 풍경을 벗삼아 유유자적 걷는다. 자전거를 타고 곁을 스치는 사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산책하는 사람이 보인다. 째잭, 시끄러운 소리에 덤불 숲을 쳐다보니 통통한 참새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 빨간 열매, 저 나무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아도 풍경은 여전히 반짝인다. 요즘 내 기억력은 사물의 이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이름을 잊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마주하는 순간 자체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주인공은 친구의 집을 찾아가지만 나는 탁상달력을 받기 위해 은행을 찾아가는 중이다. 기다란 성냥갑을 세워놓은 듯 하늘 향해 직사각형으로 서 있는 아파트 단지들이 낯설다. 이미 완성된 곳도 있지만 한창 공사 중인 아파트도 있어서 여기가 어디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단지 내 직감만을 믿고 걸어가고 있다.


여기쯤에서 올라갈까? 수변 산책로를 벗어나니 낯선 아파트 단지가 펼쳐졌다. 자연에서 도시로 넘어오니 길이 조금 복잡해졌지만, 이런 방황도 재미있다. 길을 잘못 들어도 결국엔 목적지에 닿을 테니까. 오늘도 나의 내비게이터는 여실히 고장났음을 알려준다. 아파트 공사장 한가운데에 선 나는 주변을 둘러보지만 긴장하지는 않는다. 계획보다는 조금 헤매겠지만 시간이 걸릴 뿐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시간이 늦으면 내일 또 집을 나서보자! 당분간 나에게는 시간이 많다. 핑계삼아 운동한다고 생각하면 집 나서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내 발로 한 시간을 넘게 느릿느릿 걷자니 헝클어진 마음이 아이스크림 녹듯 살살 녹았다. 이것이 걷는 미학이지 싶었다. 계획 없이 무작정 걷고, 무작정 해보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완벽하지 않으면 어때, 조금 헤매면 어때, 실패하면 어때! 오늘 나는 탁상달력을 받으러 가는 길에서 더 많은 것을 얻었다. 목적지에 닿는 것보다, 걷는 길 위에서 내 마음이 녹아드는 시간이 더 소중했다. 어쩌면 이런 헤맴 속에 진짜 하루의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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