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퍼 아들이 엄마와 함께 여행 후 알게 된 것들
엄마와 단 둘이 유럽 한 달 여행을 마쳤다.
시작은 이러했다. 서퍼들의 성지인 포르투갈에서 한 달 살기. 유럽을 여행하기보다는 서핑이 목적이었기에 여유로운 일정을 계획했고 엄마와 함께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내 계획을 대충 말해주며 엄마에게 함께 갈 건지 물었고 엄마는 만약 함께 가면 아들의 여행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가 꼭 함께 여행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적극적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결국 엄마는 스케줄을 조정했고 그렇게 엄마와 나의 한 달 유럽 여행이 시작되었다.
첫 유럽여행이자 아들이 데리고 가는 여행에 신이 난 엄마는 뚱스(엄마의 동네 모임)에게 자랑한 모양이었다. 이 이후로 나는 여행을 계획할 때 엄마뿐 아니라 뚱스를 상대해야 했다. 하루는 엄마가 뜬금없이 우리 한 달 내내 포르투갈에만 있을 거냐고 물었다. 아마 뚱스들이 긴 여행 동안 포르투갈에서만 머무는 게 아깝다고 말한 듯했다. 서핑 트립이 목적인 나는 포르투갈에서 '서핑하며 여행'을 생각했지만 엄마와 뚱스는 '아들이 데리고 가는 유럽 여행'이 주제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최종 계획에 프랑스에서 일주일이 추가되었다. 사실 포르투갈에 가려면 프랑스를 경유해야 했었는데 ‘유럽여행’ 하면 ‘프랑스’ 아닌가. 엄마도 프랑스 파리라는 타이틀(?)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여차저차 코로나로 인한 복잡한 입국서류 준비를 마지막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나도 첫 유럽인데 엄마와 함께 할 생각에 부담감이 생각보다 컸다. 그 부담감은 내 짐을 줄여 캐리어 대신 배낭에 짐을 챙기는 것에서 나타났다. 엄마를 최대한으로 도울 수 있는 체력과 빈 손을 만드려고 했고, 여행을 다녀온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길가에서는 엄마가 직접 캐리어를 끌고 다녔지만 버스에 오르내릴 때, 계단에서, 공항에서 등 순간순간 힘이 필요 한 순간이 꼭 있었다. 이때마다 별 불편함 없이 내 짐과 엄마의 캐리어를 모두 관리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하여 파리 시내로 가는 루아시 버스 안에서 엄마는, 다리를 모으고 팔은 힘 없이 무릎 위에 올린 채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얼굴은 돌리지 않고 눈으로만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피곤해 보이는 눈을 감았다. 한국에서 사람 많은 지하철을 타면 종종 여자 친구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자리 앞에 있는 손잡이를 대롱대롱 붙잡고 있는 남자 친구를 볼 수 있는데, 아마 루아시 버스 안에서 엄마와 나의 모습이 이러했을 것 같다.
아직 몸의 피로를 신경 쓰기보다 설렘에 집중할 수 있는 나이인 나는 엄마를 보며 뭔지 모를 썩 좋지만은 않은 감정을 느꼈다. 여행지에 도착해서 지쳐 보이는 엄마가 안쓰러웠던 걸까. 엄마가 늙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느껴서 슬펐던 걸까. 잘 모르겠다. 내가 성인이 된 시점에서의 엄마는 어릴 적 나를 보호해주던, 나보다 힘이 센 그런 엄마가 아님을 알아버린 아들이다.
데이트를 성공하려면 데이트 코스를 계획하고 맛집 정보, 리뷰 확인은 필수.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여자와 데이트를 좋아하는 나는 이 정도는 준비하고 계획해서 상대를 실망시켰던 적은 잘 없었다. (전 여자 친구와 왔었던 장소임을 들켰을 때 빼고는..) 그런데 왜 엄마와의 여행을 데이트와 같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엄마는 좋고 예쁜 것이 있으면 사진을 찍어서 뚱스 톡방에 자랑했고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뚱스 톡방에 불만을 토로했다. 여행 내내 엄마의 요구는 단 한 가지였다. 맛집. 이외에는 모두 내 일정에 맞춰 졸졸졸 따라다녔는데, 아들의 여행을 방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 엄마도 맛집 하나는 절대 양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맛집 탐방과 먹을 것에 진심인 그녀들 '뚱스' 톡방에 자랑거리가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먹는 것에 관심이 없는 아들은 시간을 쪼개고 쪼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즐기려고 노력 중이었고 당연히 맛집에는 소홀했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엄마는 삐졌고 ㅋㅋㅋㅋ 그제야 나는 심각성을 파악했다. 처음에는 맛집을 찾아보자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글도 제대로 못 알아보는, 처음 와보는 거리에서 맛집을 찾을 리가 있나. 매번 실패를 하고 엄마의 체력은 점차 방전되었다. 결국 나는 내가 관광지와 놀거리, 서핑스팟을 찾던 것처럼 맛집을 아주 열심히 서칭 했다.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하면 된다. 결국 나는 맛집 찾는 방법을 터득했다. 구글맵의 도움을 받아서 별점 순으로 맛집을 나열. 오픈 시간 확인. 미리 메뉴판을 보고 번역해서 엄마에게 묻기. 방문자들이 직접 찍은 사진 보여주기. 식당까지 최고의 경로(빠르고 무섭지 않은 길)로 모시기. 여행 막바지 포르투에서는 맛집 가이드가 되어 엄마를 만족시켰고 같은 레스토랑에 3번이나 가서 식사를 하는 쾌거를 이뤘다. 다음 여행은 내가 서핑 스팟을 여러 곳 찾아둔 것처럼 엄마를 위한 맛집도 미리 준비해서 떠나야겠다. 이제 엄마는 나를 따라다니니까.
포르투갈에서는 여행자들이 에어비앤비를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우리도 에어비앤비를 이용해서 숙소를 선정했다. 문제는 리스본에 위치한 에어비엔비에서 자고 일어난 바로 다음 날 일어났다. 여행에 관한 모든 일정과 계획 등 여행에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던 엄마는 혼자 한인민박을 알아보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정말 기본적인 휴대폰 사용법 정도만 익혔다. 혹여나 엄마가 시대에 너무 뒤처질까 직접 인스타그램을 다운로드하여 내 계정만 팔로우시켜주고, 카카오톡 계정, 뱅킹 계정 등 모두 알려줘서 간신히 뒤처지지는 않고 있지만, 혼자서 포르투에 두 개뿐인 한인 민박을 찾고, 사장님께 연락하여 계획을 짜고 있다는 게 너무 웃프고 재미있어 내게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엄마는 따뜻한 전기장판과 한국음식, 한국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아쉽게 일정이 맞지 않아 한인 민박은 이용하지 못했다. 그래도 한국음식을 먹으러 30분을 넘게 걷고, 한인식당 오픈 시간에 맞춰 웨이팅 하면서, 관광지에서 만난 한국 아주머니와(그 아주머니도 딸이랑 여행 왔는데 한국인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대화하는 엄마를 기다리고 구경하면서, 히터가 빵빵하게 나오는 호텔에 최대한 머물면서 여행을 이어나갔다.
이제는 여행 시작 전 고추장과 여행용 전기장판, 라면, 맥심, 커피포트 등을 챙기려 하는 엄마를 말리지 말아야겠다. 내가 서핑 슈트와 서핑용 리쉬 코드, 왁스를 챙기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관심 없는 척했던 엄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