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우리 오 남매는 본인이 포기한 세상에 나아가 활개 치며 살아줄 꿈나무들이었다.
아버지는 자신과 자식들은 살아갈 조건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자신만큼 노력만 한다면 세상에 거칠 것 없는 조건이라고 보셨다. 그래서 작은 오빠의 자잘한 일탈마저도 어떻게든 다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신 거겠지. 둘째 아들의 영재성을 안타까워한 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셨다. 장사를 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작은 오빠가 학교를 안 갔다고 연락이 오면 만사를 제치고 여기저기 찾아다니셨다.
그러나 두 분의 교육관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엄부자모다. 엄마는 작은 오빠의 자잘한 일탈에 대해 야단은 쳐도 빠져나갈 구멍은 줘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작은 오빠의 사춘기를 이해하신 것이다. 아버지 몰래 용돈도 챙겨주고 어떻게든 다독이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 인생의 실패를 아들이 반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 크셨던 것 같다. 그래서 둘째 오빠를 때로 모질게 대하신 게 아닐까? 엄마는 자식 교육에 대해 대부분 아버지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이혼 운운하시며 달려드신 적이 있다. 자식 교육을 빙자해서 둘째 아들을 심하게 때린다며 말이다.
쓰다 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표면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면의 모습이다. 당시 이해되지 않았던 것을 후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 하고 깨닫게 되는 경우다. 나는 가끔 남편이 성정이 급해 화를 잘 낸다고 생각했다. 그런 태도가 유별나게 힘들 때가 있었다. 어쩌다 가족이 외식을 하러 갔을 때가 그 예다. 사소한 일로 다른 사람과 부딪쳐서 큰 소리가 나는 게 나는 싫었다. 오래간만에 기분 좋게 나온 가족들 기분이 상하는데 왜 그 모양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깨닫게 되었다. 남편이 타인에게 화를 낼 때는 이유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나나 아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한다고 느꼈을 때였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것 먹고 기분도 내려고 나왔는데 누가 가족을 건드리는 건 참을 수 없어 그랬다는 걸. 나중에는 혹 누가 가족을 건드려도 나나 아이들도 만만치 않으니 가장이라고 책임감을 느껴 과보호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남들이 어떻게 행동하건 가족들이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혼자 청요리에 계실 때 일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몹시 섭섭해하셨다. 막내랑 궁평 항에 바람 쐬러 간 사이에 작은 오빠가 왔다 갔기 때문이다. 좀 기다렸다 아버지를 보고 갈 것이지 그냥 갔다면서 얼마나 섭섭해하시는지. 아버지는 매주 오는 나나 막내 그리고 셋째도 기다리셨다. 어떤 날은 그냥 전화를 해서 보고 싶으니 오라고도 하셨다. 그러나 심중에 더 기다린 자식이 있었다. 내 위로 두 오빠들이다. 특히 작은 오빠를 많이 기다리셨다. 내가 두 오빠에게 전한 적은 없다. 형편이 그런 걸 어쩌냐면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난 뒤 큰오빠가 두 분 모시고 해외여행 한 번 가는 게 꿈이었는데 결국 못 갔다고 그게 아쉽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끝끝내 허락을 안 하셨다는 거였다. 나 역시 몇 번 숙소를 예약해 놓고 두 분을 모시고 가려고 시도했었다. 번번이 실패해 엄마만 모시고 가야 했다. 아버지 핑계는 단순했다. 개밥이나 닭 모이를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개나 닭에게 딸인 내가 밀리나 싶을 정도였다. 구포리 산 아래 살고 계시던 작은 할머니에게 부탁하고 가시자고 해도 소용없었다. 심지어 셋째가 미국에 살 때 두 분에게 오라고 했는데도 엄마만 가셔야했다.
그런 아버지가 구포리 산에 있는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중국을 가셨다. 나에게도 명령이 떨어졌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와서 닭과 개를 챙기라고. 그렇게 작은 오빠가 운영하는 회사가 있던 청도에 가셨다.
아버지 삼우제 때 이야기다. 작은 오빠에게 물어보니 아버지가 중국에 오셨던 이야기를 그제야 했다. 오빠가 운영하던 중국 공장은 규모만 10000평에 직원이 1500명 정도였다. 아버지는 공장을 둘러보시고 해방 이후 군수업체를 하던 창신동(동대문 밖) 이모할머니 공장보다 더 크다며 엄청 뿌듯해하셨단다. 작은 오빠는 그 일로 산업훈장까지 받았지만 중국에서 끝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한국의 중소기업이 중국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걸 2000년 초반 우리 가족들은 작은 오빠의 사업 실패로 알게 되었다.
막내는 매주 토요일이면 화성에 가서 엄마를 모시고 장도 보고 남양 주변으로 바람도 쏘이러 다녔다. 아버지는 같이 가자고 졸라도 따라나서지 않으셨단다. 그건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심지어 사위인 남편이 같이 나가시자고 해도 허락하시는 일이 없었다. 뭐 하러 돈 쓰러 다니느냐며 난 안 간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신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야 막내를 따라나섰다. 막내는 혼자 계시던 아버지를 모시고 궁평항을 매주 다녔다. 바람도 쏘일 겸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새우튀김 같은 간식이나 먹거리를 챙겨드린 것이다.
돌아보면 아버지는 허투루 돈을 써 보신 적이 없다. 자신을 위해 돈을 쓴다는 건 거의 금기였다. 공장을 운영할 때 급전을 쓰신 적은 있다.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엄마를 고생시키는 빌미가 된 적은 많다. 그 급전은 대부분 사업 자금이었다. 성정이 그런 분이셨다. 평생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돈을 쓰거나 시간을 낭비해 본 적이 없었다. 절제와 검소가 몸에 배어 있으셨다. 다만 그런 검소함이 재산의 축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게 아쉽지만 말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단양 숙소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다. 그때 각자의 아들과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날밤을 새웠다. 화제의 공통점은 남편이 아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특히 아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부자 관계를 어떻게 힘들게 만들고 중재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였다. 들어보니 내용은 비슷했다.
- 너는 나보다 좋은 조건이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다 이룰 수 있는 걸 왜 그것밖에 못하느냐? -
아무리 아들이 노력을 해도 개천에서 용이 된 아빠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 공부만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는데 아들들은 기회를 날렸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였다. 게으름과 무능력 거기다 유약함 때문에 말이다. 한마디로 아들은 부족한 놈이었다. 아들이 무엇을 이루어도 그게 부족해 보이는 아버지들.
우리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 기저에 깔려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작은 오빠의 일탈이라야 요즘 세대 입장에서 볼 때 별 거 아닌 것들이다. 34년 동안 중학생을 가르쳐 본 내 입장에서는 일탈이라고 부르기에도 우스운 일들이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혼자 서울로 와 양복점에 점원으로 취직해서부터 조금도 한 눈을 판 적이 없으셨다. 평생 술 담배를 안 하셨으니 타인에게 실수할 일도 없었다. 당연히 자식들도 그 눈높이에 맞춰 아버지만큼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혹 작은 아버지 같은 경우가 될까 봐 우리들을 더 다잡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 아버지가 다니신 선린 상고는 당시 좋은 학교였다. 아버지 같은 노력을 했다면 작은 아버지의 삶도 훨씬 평탄했을 터였다. 기회도 많았고 인물도 좋으셨다. 그러나 작은 아버지는 노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불필요한 언변이나 처신도 문제가 되었다. 그런 문제의 배경에는 막내아들에 대한 우리 할머니의 지나친 편애에서 비롯되었다고 느꼈다. 할머니의 아들 사랑 대부분이 작은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물론 늦게 얻은 막내아들에 대한 사랑을 이해는 한다.
제기동에 살 때 술 취한 작은 아버지가 가끔 우리 집에 와서 소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할머니는 막내아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게 없으셨다. 이미 늙고 힘이라고는 없는 상태셨다. 난동에 가까운 행동이나 폭언을 가만히 듣고만 계셨다. 소란 소식을 듣고 집으로 오신 아버지와 큰소리로 다투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도 오 남매의 학비로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상황이라는 걸 조부모님들이 모르시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냥 서로 도우며 살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고 안쓰러우셨던 게 아니었을까? 그게 부모의 마음일 것 같기는 하다.
우리 아버지는 형제 복이 너무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외갓집의 형제애를 부러워하신 모양이다. 우리에게 만복의 근원은 형제애에 있다고 자주 설교하신 이유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다행히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도 불필요한 다툼을 벌인 적이 없다. 부모님 부양과 관련된 일도 서로 도우려 애썼다. 주변에서 부모님 부양 문제로 다툼을 일으키는 경우를 많이 봤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다음에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경우도.
그러나 우리 오남매는 각자 가정을 꾸리고 40년의 세월이 흘러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이 많이 달라졌더라도 그걸 뛰어넘는 것들이 있었다. 그게 아버지가 우리에게 준 교훈이 아닐까? 적어도 우리는 부모님 앞에서 작은 아버지처럼 거친 언사를 쓴 적이 없다. 아버지가 오 남매에게 남겨 준 것 중 하나가 형제애 아닐까? 형제애가 남다른 우리들이야말로 아버지 인생의 최대 성공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의 아버지 권자 윤자 택지를 쓰셨던 분은 개인적인 삶으로 봤을 때 인고의 나날을 사셨다. 세상의 잣대만이 아니더라도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들에게조차 크게 인정받지 못하셨다. 그러나 자식들이 아버지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에 대해 나름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적어도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걸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성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 아버지는 이 땅에 태어나 어두운 시절을 살다 간 수없이 많은 분들 중에 한 분이셨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분의 행적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오 남매가 있기에 아버지는 누구보다 성공한 삶을 사셨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