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여행사가 전데요.
대선 다음날 새벽에 깼다. 이유는 모르겠다. 낮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이유 없이 새벽에 시간이 나는 날이면 글을 쓰고 싶어진다. 아마도 현대인들이 사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건 이렇게 종종 쓸데없는 일에 낭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서겠지.
모처럼 쉬는 날의 일과는 이랬다. 사전투표를 했으므로 마음 편하게 늘어지게 잔다. 일어나서 간단히 씻는다. 애매한 봄옷을 진공포장 해서 수납함에 넣고, 꽤 늦게 까지 쌀쌀했던 날씨 탓에 옷장 안에서 애매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던 한여름 옷들을 옷걸에 착착 건다. 그리고 때를 놓쳐 맡기지 못했던 트렌치코트를 세탁소에 갖다 맡긴다. 세탁소 가는 길목에 있던 카페를 보자 커피 생각이 간절해졌지만 청소를 마치고 가뿐하게 나올 생각으로 미룬다.
화장실에 목욕용품을 바구니에 담아 밖에 내놓고 락스를 둘러 뿌린다. 그다음으로 거실과 침실을 청소기로 돌리고 물걸레 질을 한다. 마치고 나면 화장실에 물을 뿌리고 특별히 더러운 곳은 솔질을 한다. 거울을 닦고 수도꼭지와 샤워기를 닦은 후 하수구를 청소한다. 뿌듯하게 마치고 나면 간단히 샤워를 하고 책 두 권, 미도리노트, 볼펜, 카메라, 핸드폰을 챙겨서 산책을 나섰다. 비가 온다더니 날씨가 맑기만 했다.
나선김에 택배를 부치러 자주 가는 편의점에 들렀더니 나이 지긋한 주인할아버지께서 투표를 했느냐고 물어서 잘하고 왔다 하니 기특하다며 손에 산딸기를 쥐여주셨다. 바빠서 건너뛰었던 제철과일의 맛은 새콤하고 또 달콤했다.
산책길을 따라 걷다 바람에 흔들리는 녹음을 보며 잠시 감상에 빠지는 시간도 가졌다. 평일에 이렇게 여유롭다니, 일요일이라면 주말이 가는 게 아쉬워서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도 못했을게 틀림없다.
지나가며 눈여겨본 카페를 돌아오는 길에 들어갔다. 1시가 넘었는데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다 바깥으로 맑은 하늘과 나무가 보이는 좋은 자리가 비어있어서 망설임 없이 들어섰다. 커피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 너무나 다 좋았지만 지나치게 자연친화적인 카페였다(벌레가 내내 나와 함께 했단 뜻이다).
얼마 전에 독립서점에서 구매한 <커피 앞에서 쓰기>를 꺼내 읽었다.
아무도 없는 카페에서 혼자 책도 읽고 메모도 하고 있자니 손님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것에 용기를 낸 손님들이 한 두 명씩 들어찼다. 이윽고 얇은 책을 한 권 다 읽을 때쯤엔 카페가 북적였다. 마침 커피도 빵도 다 먹은 뒤였기에 미련 없이 책을 덮고 나왔다. 이 불경기에 장사가 안 되는 곳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조금 더 길목을 내려가다 또 한산해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창가에 커피 한잔을 시켜 앉자마자 지나가면서 기웃거리던 손님이 들어왔다. 종종 이 정도면 손님을 끄는 토템이 아닐까 싶어진다.
여기는 인테리어도 공간도 매우 깨끗했으나 사운드가 거슬렸다. 헤드셋을 끼고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서 후루룩 읽었던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모든 책은 다시 한번 더 읽었을 때 비로소 문장이 빛난다고 믿는다. 세상에 읽을 책도 많고 할 일도 많지만 같은 책에 여러 번 시선을 주는 순간을 좋아한다.
사실 나는 산책도, 바깥에 나서는 것도 무엇하나 선호하지 않는다. 타고난 체력이 좋질 않아 나가려면 많은 품이 필요하고, 집을 나서는 순간 기력이 쭉쭉 떨어진다. 게임으로 치면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독속성 몬스터에게 당한 것처럼 -10, -20 -99 하고 hp가 닳는데 현실에선 포션조차 없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나서려는 이유는 이곳에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다.
요즘 입사동기들 사이에선 “퇴사”라는 유행어가 입에 붙었는데, 나도 진지하게 얼마 전까지 퇴사를 고민했다(나뿐 아니라 다들 진지하게 현재진행 중으로 고민 중이다).
그런데 전에 일하던 지역에서의 기억이 별로 없는 것이 생각났다. 나쁜 기억을 잔뜩 안고 나에게 자면서 이를 갈 정도의 노동강도를 선사한 그곳은 좋은 풍경으로 유명했으나 삶에 너무 찌든 탓에 그 주면을 둘러볼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이곳에서 삶도 일만 하다 이동한 곳으로 기억될까 봐 약간 겁났다. 내가 이렇게 팍팍하게 살아서 남는 게 뭔가 싶어 져서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렇다. 이런 것에서 조차 지나치게 계획적인 나는 스스로가 조금 피곤해졌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나섰다가 마음 끌리는 곳으로 들어가기엔 지나치게 길치였다. 그것도 잃은 길을 한자리만 빙글빙글 도는 길치.
서툴지만 나는 나만의 동네 여행을 시작했다. 성과는 꽤 있었다.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사람이 많아 나와 방황하다 들어간 카페는 정말 정말 예쁜 공간에 맛있는 빵을 팔고 있었고, 그렇게 종종 성공적인 카페 탐방기를 했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 앉아있다 보면 사람을 불러들이는 토템역할 탓에 혼자 오래 앉아있기 민망했던 나는 셀프로 여러 번 쫓겨났지만 좋은 리스트를 쌓을 수 있었다.
집에 콕 박혀있길 좋아하는 내 성향을 아는 직장동료들이 요즘 왜 그렇게 자주 나서냐고 물었을 때, 미련 없이 실컷 둘러볼 거라고 대답했다가 “퇴사해요????”라는 질문을 들었으나(예리하군) 요즘 나는 이렇게 부지런히 살고 있다. 스스로가 대견해질 지경이다.
뭐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집 지박령 도비가 바깥을 나섰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스트레스도 해결되고 직장에서의 성공도 쌓게 되었답니다~라는 자기 계발서 같은 결론이 나진 않지만 요즘의 내가 조금은 더 좋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날은 조금 일찍 나서서 빵을 사서 잠시 여유 부리다 출근하기.
그게 아니라면 아침에 잠시라도 사치 부려 거한 아침을 해서 먹고 나가기(그래봤자 샐러드지만).
그렇게 아침에 1시간 정도를 꼭 확보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으로 삼고 있다. 직장생활은 여전히 싫고 거지 같고 인간들도 다 싫어서 미칠 것 같은 날에도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너무나 맛있으니까.
3n살의 나는 어릴 때 어르고 달래서 유치원에 보내던 엄마와 아빠처럼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서 출근시키는데 짐심인 사람인 것으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