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을 다루는 법, 그리고 아이를 믿는 일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다. 결핍은 때로 상처였고, 때로는 삶을 밀어 올리는 추진력이었다. 중요한 것은 결핍을 숨기거나 없애려 애쓰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돌보고 쓰느냐이다. 나는 배움의 결핍을 안고 자랐다. “여자는 많이 배울 필요 없다”는 말 사이로 배움은 늘 닿을 듯 말 듯한 곳에 있었고, 그래서 더 배우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그 결핍을 내 편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배우지 않으면 불안해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나만의 속도로, 내 삶을 이롭게 하기 위해 배우고 있다. 결핍은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방향을 얻은 결핍은 더 이상 나를 휘두르지 않다.
부모가 되고 보니, 결핍은 조용히 자녀 곁으로 스며듭니다. 우리가 어릴 적 받지 못했던 것, 미처 소화하지 못한 경험은 아이를 돌보는 순간 낯익은 얼굴로 나타납니다. 가난을 겪은 부모는 돈의 중요성을, 배움의 서러움을 겪은 부모는 공부의 필요를, 외모로 상처받은 부모는 단정함을 강조합니다. 의도는 사랑이지만, 지나친 사랑은 때때로 통제가 되고, 통제는 아이의 세계를 좁힙니다.
어릴 적 놀림을 받았던 엄마는 아이가 같은 상처를 겪지 않게 하려고 하루 섭취 열량을 계산하고, “그만 먹어”를 입에 달고 삽니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는 그 방식이 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 자기만의 축을 세우기 시작하면, 먹을 것을 고르고 멈출 시점을 정하는 힘이 생깁니다. 그때도 엄마가 선택과 책임을 대신하려 들면 갈등이 시작됩니다. 아이는 자기 몸의 신호를 읽을 기회를 잃고, 부모는 더 강한 통제로 불안을 달래려 합니다. 서로의 마음은 멀어지고, 밥상은 전쟁터가 됩니다.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려면 부모는 먼저 자신의 결핍을 바라봐야 합니다.
“왜 나는 이 장면에서 유독 불안한가.”
“아이에게 실제로 위험이 있는가, 아니면 나의 과거가 말을 거는가.”
질문 앞에서 솔직해질 때, 통제 대신 신뢰를 고를 힘이 생깁니다. 신뢰는 무관심이 아닙니다. 신뢰는 아이가 선택하고, 결과를 겪고, 다시 조절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만 먹어” 대신 “지금 배부름을 10점 만점에 몇 점으로 느끼니?”라고 묻는 일, “오늘은 금지” 대신 “간식은 하루 한 번, 종류는 네가 고르고 양은 이 접시에 담아보자”라고 제안하는 일입니다. 아이의 몸과 마음을 믿는 태도는, 아이가 스스로를 믿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아프지 않기를, 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온실의 꽃은 작은 바람에도 쓰러집니다. 삶은 비바람을 피하는 기술보다, 비바람 속에서 몸을 낮추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칩니다. 태풍을 맞히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실패해도 안전이 보장되고 스스로 수습 가능한 작은 비바람을 통과할 기회를 허락해 주자는 것입니다. 아이는 그 과정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자신만의 향기를 지닌 꽃으로 피어납니다.
결국 아이들은 말한 대로가 아니라 본 대로 자랍니다. 부모가 자신의 결핍을 다독이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바꾸는 모습을 볼 때, 아이는 삶의 어려움을 미리 두려워하기보다 다루는 법을 배웁니다. 나는 오늘도 내 결핍의 이름을 부릅니다. 배움의 결핍, 인정의 결핍, 안전에 대한 과잉. 이름을 붙이면 거리가 생기고, 거리가 생기면 다루는 법이 보입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합니다. “너는 나와 다르고, 너는 너의 길을 갈 수 있어.”
아이를 믿는 일은 내 과거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과거를 자원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부모가 먼저 그렇게 살 때, 아이는 그 길을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본 대로. 오늘, 나의 결핍 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아이와 함께 다루는 연습을 시작합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내일,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