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라 전기(鍮達 傳奇) #0.6 천종의 후예

by 회안림

유타라 태초의 시공은 고요 그 자체였다.
은월이 한 마리 학처럼 날아와 바위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유건 끝의 매듭이 맵시 있게 휘날렸다.

그녀는 손을 바위 위에 얹고 기척을 살폈다.
유타라의 가장 높은 바위, 심판석.
고대에는 이곳에서 천계의 문이 열리고, 아랫바위에서 기다리던 혼들이 천국과 지옥의 심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곧 깨어날 시간이야. 스승님도 오늘이라고 하셨고...”

그 순간—
등 뒤에서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거긴, 내가 한 달 전부터 맡아둔 자리야.”

은월이 돌아보았다.
검은 도포, 정제된 문사 복장.
목에는 작고 은은하게 빛나는 십자 묵주.
신발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정갈한 느낌이었다.

"천종?"
십자 묵주를 보니 유교 천종이 분명했다.

"너,심종이군."

천종, 그들은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던 비운의 종파다. 대종사 공자는 인격신 상제를 기능신 천으로 전환시켰다. 세상은 신 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선포되었다. 그런 세월 동안 제례를 올려야 할 인격신 제를 잃어버렸다. 유교 천종은 그 인격신 제를 천주교의 성경에서 비로소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말기 천주교는 오히려 천주유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열 번이 넘는 대대적인 천주유교 박해는 그들을 ‘원한의 종파’로 만들었다.
은월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맡아두기만 하면, 천하가 다 자기 건가요? 천종 사람들 참 특이하다.”

천종사 진전이 어이없다는 듯 받아쳤다.

“심종도 꽤 독특하네. 붓으로 점찍으면 천하가 다 자기 자린가?”

"내가 언제?"

은월이 입을 비죽거렸다.

“한 달 동안, 난 이 자리에 매일 왔어. 매일.”

은월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걸 어떻게 믿어? 증거 있어요?”

진전은 턱을 가볍게 치켜들며 말했다.

“이 바위가, 얼마나 고요했는지 넌 모르지?
매일, 내가 지켜봤거든.”

은월은 피식 웃으며 쫑알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증거다?”

“그치.”

“그 아무 일도 없었던 거면, 나랑 뭔 차이가 있나?”

“놀랍게도, 그걸 몰랐단 게 차이지.”

“흥, 어째튼 오늘은 내가 먼저고. 정 보고 싶으면, 저 아래 바위에서 보세요.”

진전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이게, 내가 모를 줄 알고..​.
너야말로 저 밑에서 봐라."

"싫어요. "

"거봐, 너도 싫지?
여긴 심판하는 자리고, 저긴 심판받는 자리다.
기분이 다르지. 기분이..."

진전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쿡— 눌렀다.

“이 오빠가 진짜…”

은월이 진전의 손가락을 잡아다 깨물었다.

“넌 진짜...!”

그 찰나—
시공이 미세하게 울렸다.
바위틈에서 백색 결들이 빛살처럼 퍼지며, 공중에 일렁였다.

진전은 인상을 쓰면서 손가락을 급히 빼내고, 곧장 은월의 입을 막았다.

“쉿. 깨어난다.”

은월의 눈이 커졌다.
말도 숨도 멈춘 채—두 사람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시공의 결이 가르듯 갈라지며, 천천히 열리려는 찰나였다.
그 속에서—
오래도록 잠들었던 존재가, 깨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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