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몽 소설

2044년 하이브리드 전쟁

잠든 몸 깨어나는 의식. 나는 무수한 시공을 여행한다.

간 밤에 자각몽 비슷한 상태로 긴 꿈을 꾸었길래 조금 각색해 보았다.


​2044년 가을,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가 인지하기도 전에 은밀히 결정되고 있었다. 일본 규슈 인근의 규모 9.2 대지진은 단순히 지각을 흔든 것이 아니었다. 한국 조차 해저케이블이 모두 단선되어 스타링크로 국가기간망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국가 운영 AI '아마테라스'의 서버가 물리적으로 파괴되자, 열도 전체는 유례없는 블랙아웃에 빠졌다. 사정이 한층 더 심각하여 통신망뿐 아니라 전력망 자체가 붕괴되어 있었다. 일본 군부는 국가 생존을 위한 극단적 결정을 내렸다. 한반도 남부의 '친환경 AI 전력망'과 백업 슈퍼서버 단지를 강제로 탈취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한국 시스템을 일본 시스템에 이식(Grafting)하는 오퍼레이션 아마테라스 작전이었다.

일론 머스크 사후, 철저히 수익과 리스크 관리 알고리즘으로 구동되던 스타링크(Starlink) 운영 이사회는 일본의 로비에 의해 동북아 상공의 저궤도 위성망을 일시에 차단했다. 명분은 기술적 중립이었다.

​미국은 주 정부 간의 내전으로 고립되었고, 중국은 자국 데이터 국경을 봉쇄했다. 대한민국 전역의 통신이 마비된 그 '디지털 암전'을 틈타, 일본의 하이브리드 기동함대는 광학 스텔스를 가동하며 남해안을 넘어 중부 내륙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다.

​충북 괴산, 제3전략군 사령부. 공기는 비릿한 금속성 냄새와 함께 폭풍 전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 군수지원분대는 차세대 전술 모듈인 TMCM(전술 임무 제어 모듈)의 현장 테스트를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이게 대대급 전술 가방입니까?"
​내가 묻자 지원소대장은 말없이 마스터 버튼을 눌렀다. 8개의 검은 티타늄 가방이 동시에 저주파음을 내며 맥동하기 시작했다.
​"전시엔 이것이 야전군의 신경망이다." 소대장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연결되는 순간 고효율 서버가 되지. 이게 없으면 우리는 드론의 사이버 공격 앞에 눈먼 장님이 된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사령부 전체에 저음의 사이렌이 울렸다. 기지 내부 스피커에서 격앙된 보고가 터져 나왔다.
​"코드 레드! 사령부 후방 하위 노드 80% 응답 소멸. 소멸신호 기준 적 하이브리드 부대, 본부 후방 10km 지점 접근 추정!"
​믿을 수 없는 보고였다. 적은 물리적 타격에 앞서 인지전(Cognitive Warfare) 바이러스를 살포했다. 아군과 적군의 식별 기호가 뒤섞인 화면 앞에서 지휘관들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채 극심한 인지 부조리에 빠졌다. 사령부 상공에는 이미 은백색 구체 형태의 일본제 '오니(Oni)'급 드론들이 불규칙한 관성 이동을 보이며 나타나 있었다.

​사령부 상황실로 뛰어올라간 우리를 맞이한 건 절망적인 정적이었다.
​"통신망 블랙아웃입니다. 인근 부대와 연락 불가."
​통신병의 보고에 소대장은 상황실 메인 터미널을 가리켰다.
"TMCM 가방 병렬 연결하라. 전 인원 완전 무장.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이곳을 사수한다."
전술​가방이 병렬연결되어 준 슈퍼서버처럼 사령부의 양자 연산을 분담하기 시작하자, 사령부 시스템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하지만 연산력을 집중하느라 기지 외곽의 능동방어체계(APS)가 일시 정지되었다. 그 틈을 타 하늘에서 은백색 구체들이 강하했다. AI방어프로그램이 드론떼를 마킹하며 교란했지만 외곽 방어선부터 차례대로 터져나갔다. 이대로면 서버가 있는 본부 도달까지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었다.
​"서버 과부하 임계치 돌입! 소대장님, 방어막이 버티질 못합니다!"
​그때, 서쪽 대교 너머로 묵직한 엔진음이 지면을 울렸다.
"11기계화보병사단이다! 화랑 부대 도착!"
​안개를 뚫고 나타난 K3-H 하이브리드 전차들이 포탑 위에 장착된 고출력 레이저 가이드로 상공을 조준했다. 내 전술 글라스 위로 무수한 붉은 삼각형(적)과 청색 원(아군)이 데이터 링크되었다.
​"전 분대, 요격 개시! 한 놈도 내려보내지 마라!"
​나는 내 뇌파와 동기화된 공격 드론 '살수(Salsu)-V'를 사출했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 빛의 줄기와 전자기적 파열음으로 가득 찼다. 11사단의 '에테르' 전자기포가 밤하늘을 가르며 오니 드론들을 파열시켰다.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듯했지만, 적의 후속 편대는 압도적이었다. 소대장은 무전을 잡았다.
​"적 드론은 데이터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을 지휘부로 인식한다. 우리가 미끼를 던진다."
​기간병들이 창고에서 구식 지상 드론 20대를 끌어냈다. 그 위에 고출력 데이터 비콘을 테이프로 거칠게 고정했다. 수만 개의 가짜 지휘 패킷을 방출하는 드론들이 활주로를 향해 일제히 질주했다.
​상공의 오니 드론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놈들의 AI 눈에는 이 드론 떼가 '도주하는 지휘본부'로 보였을 것이다. 적들이 급강하하며 연병장에 불꽃을 뿌리는 찰나, 소대장이 짧게 무전했다.
​"지금입니다."
​매복해 있던 11사단 전차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눈부신 백색 섬광이 밤하늘을 찢었고, 적의 공중 전력은 순식간에 숯덩이가 되어 쏟아졌다. 소대장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적의 역동기화 해킹 신호를 완전히 절단하며 시스템을 잠금(Lockdown)했다.

​"상황 종료. 잔존 병력 소탕 중."
​보고가 들려왔지만 사령부에는 환호성 대신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서서히 본연의 푸른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연병장에는 비콘을 달고 산화한 구식 드론들의 잔해만이 연기를 내뿜으며 흩어져 있었다.
​우리는 이 고립된 사투에서 이겼다. 하지만 사령부 밖의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지원소대장은 땀에 젖은 헬멧을 벗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고생했다. 일단... 서버 온도부터 체크해."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떨리는 손끝까진 숨기지 못했다. 2044년 고립된 전장은 과열된 전술 가방의 냉각 팬 소리와 전사들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서버실 안에서 푸르게 빛나는 8개의 TMCM 가방만이 우리가 이 지옥 같은 밤을 건너왔음을 증명하고 있었다.